10여 년 전의 일이다. 어느 대기업의 하청업체 직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나와 비슷한 나이었던 터라 ‘젊은 사람인데 안 됐네.’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기사의 내용이 희미해 갈 때쯤, 사회운동가로 활동 중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돌잔치 사진을 편집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사진 속에서 해맑게 웃는 달이는 기사에서 보았던 하청업체 직원의 딸이었다. 인연이 이렇게도 이어질 수 있구나.. 몇 번을 생각했다. 사진을 보정하며 달이의 웃는 모습에 덩달아 입꼬리를 올리는 사이, 금세 정이 들어버렸다.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두고 떠날 결심을 하기까지, 아빠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어렵다. 동료들은 그의 죽음이 노조원 탄압과 표적 감사 때문이라 말했다. 그의 유서에는 배고프고 힘들었다는 말과 함께, 전태일처럼은 못해도 부디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신념이 곧 삶이 되기도 한다.
내게도 신념이 있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사람을 믿었다. 사람을 신뢰하는 데에 큰 영향을 준 분은 큰아버지이다. 그는 경제력을 잃고 이혼한 막냇동생을 대신해, 장가도 마다하고 어린 나와 남동생을 키워주었다. 월급날이면 두 손 가득 빵을 사 오던 큰아버지. 할머니께 꾸중을 듣고 풀이 죽어 있을 때도, 남동생과 싸워 약이 올라 있을 때도 늘 “집에 가자”하며 나를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고단하기도 외롭기도 했을 짐을 짊어지고도 원망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하루는 잠을 자는데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에 실눈을 뜨니, 큰아버지가 붉어진 눈시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측은지심이 나와 내 동생을 살렸다고, 살게 했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했었던 어학원의 원장님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삼십 대 중반의 젊은 여자 원장님이었는데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를 막둥이라 부르며 살뜰히 대했다. 외출을 다녀올 때는 종종 간식도 사 오고, 여행을 간다 하면 용돈도 챙겨주었다. 시간을 배려해 준 덕분에 일을 하면서도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졸업을 하고 직장생활로 정신없을 무렵, 원장님도 학원을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십 수년이 흘러 다시 그녀를 만난 날, 아득한 인파 속에서 실루엣만 보고도 눈물이 터진 일을 기억한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다정하게 알려준 어른. 두고두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 말을 늦게라도 전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대가 없이, 기대어 설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사람들 덕분에 나는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들은 선택의 기로에서 사람다움을 택하도록 안내하는 나침반이다.
나의 사람다움은 타인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그것을 깨닫게 해 준 것이 달이를 만난 일이다. 사진을 정리하면서 달이가 많은 사랑을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나와 전혀 관계없던 아이가 여러 사람을 지나 나에게 왔듯, 함께 사는 세상이기에 우리의 인연은 언제든 닿을 수 있고,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의 일로 아플 수 있으며, 나의 생각과 이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도 달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가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다면 달이는 어느 곳에서든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침반이 되는 사람들이 가르쳐준 것처럼 몇 겁의 시간을 건너 서로에게 닿은 인연을 귀하게 여기고, 따뜻함을 나누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