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시간은 흐른다

by 배진화

그렇게 많은 인파를 본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나는 횡단보도 옆의 나무 아래, 길을 잃은 아이처럼 초조하게 서 있었다. 아빠는 절대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고 했지만, 그는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혹시나 내가 있는 곳을 잊은 것은 아닌지, 나쁜 마음을 먹은 누군가가 혼자 있는 나를 끌고 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다급한 마음과는 달리 가물대는 시간이 흘러 울상이 죽상으로 바뀌어 갈 때쯤, 드디어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땀에 흠뻑 젖은 채, 표를 쥐어 든 손을 흔드는 아빠.

그날은 92년도, 롯데자이언츠가 우승을 거머쥔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롯데의 광팬이었던 아빠는 자주 남동생과 나를 데리고 야구장에 들렀다. 고작 열 살 남짓한 꼬마들에게 그곳은, 평소 잘 먹지 못하는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실컷 먹는 곳이지 룰을 이해하며 함께 즐길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래서 보통은 주어진 간식을 다 먹어치우고 6회 말 정도가 되면, 의자에 던져놓은 빨랫감처럼 몸을 배배 늘어트렸다. 그러면 아빠는 내 팔로 손뼉을 치며 응원가를 부르거나 관심 없는 경기 규칙을 애써 설명해주곤 했다.

어쨌든 92년 결전의 날- 그날의 경기는 무조건 관람해야만 하는, 아빠에게도 포기란 없는 날이었다. 그러나 표는 일찍 매진되어 버렸고 아빠는 열두 살인 나를 인파 속에 세워둔 채 암표상을 찾아 나섰다. 표를 쥐고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희에 차 있던 아빠의 표정을, 33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울산에 한 업체의 엔지니어로 있던 아빠는 45세, 한창인 나이에 가스유출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어버이날, 집에 오기 힘들 것 같다며 할머니께 대신 선물을 사드리라 했던 말이 마지막 말이었다.

아빠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해 주었던 날, 그는 처음 보는 체크점퍼의 소매를 들어 올리며 둘째 형님이 사준 거라고 흐뭇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함께 맥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달이 가을로 기울어 배시시 웃던 밤에 아빠는 날이 쌀쌀하다며 내 손을 잡아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아빠와 나의 마지막은 영정사진에 절을 하던 장면도 아니고, 그의 관이 화장로에 들어가는 장면도 아닌, 손을 잡고 걷던 그날의 풍경이다.

갑작스러운 이별이라 장례식 때 눈물도 크게 흘리지 않았다. 담담히 지인들을 맞이했고, 걱정하는 표정으로 앉은 친구들에게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을까.

약속이 늦어 급히 택시를 탔는데, 라디오에서 야구 개막식 중계방송이 흘러나왔다. ‘아. 벌써 야구가 시작되었네.’

순간, 도르르 떨어진 눈물을 손바닥으로 막아 세웠다. 아빠가 없구나. 야구장에서 아이스크림을 쥐어주며 볼을 꼬집던 아빠는 세상 어디에도 없구나- 저 멀리 내버려 두었던 아빠의 빈 의자가 쿵쿵거리며 온 마음을 짓눌렀다. 흘리지 못한 눈물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아무리 삼켜 봐도 꾸역꾸역 터져 나왔다. 당황한 기사는 백미러로 몇 번이나 나를 살피고는 실연이라도 당한 거냐 물었다. 아빠가 떠난 이후에도, 언제든 전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번호를 지우지 못했던 나는, 그렇게 진짜 작별을 했다.

아빠를 보낸 지 20년이 넘었다. 그의 모습들이 벌써 아득하다. 아빠는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 나는 그가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살아내고 있으니까.

엄마가 되고 나서는 아빠가 자주 그립다. 두 녀석이 나를 웃게 할 때도,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릴 때도 그런 아이들과 함께하는 아빠의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나는 야구를 즐겨보는 사람도 아닌데,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쳐 주고 싶다. 녀석들에게 야구장이 분명 지겨운 곳이 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데려가고 싶고, 오래 입을 유니폼도 사주고 싶다. 엄마가 되고서야 야구장으로 이끌던 아빠의 걸음들이 아릿하게 감사하다.

밤 산책만 하면 두배로 들뜨는 녀석들과 고물고물 걷다가, 살랑이는 바람에 아이의 손을 잡아 내 주머니에 넣었다. 아이가 기분 좋게 올려다본다. 아빠와의 추억은 종이 한 바닥에 담길 만큼 작지만, 그가 나누어준 시간들은 내게 고스란히 새겨져, 찌르르 아이들에게 닿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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