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새벽을 지나

by 배진화

“진화야. 대학 가기로 했다며. 잘했다”
수화기 너머로 큰엄마의 축하가 들려왔다. 나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소매로 코끝에 맺힌 눈물을 훔쳐내던 장면이 떠오른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사회에 나가 돈을 벌고, 여태 부모님을 대신해 준 할머니와 둘째 큰아버지께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당연하게 그래야만 했는데 이미 발걸음은 대학을 향하고 있었다. 딱 입학금만. 염치없이 구는 것도 여기까지 만이라고 마음을 다졌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6시까지 집 근처 어학원으로 가 문을 열고, 첫 타임 데스크 업무를 보다 보면 8시 반쯤 정직원이 왔다. 대학에 다니는 내내 아침마다 거르지 않고 출근을 했다. 원장님은 한 번씩 6시 정각에 전화를 했는데 꼬박꼬박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나뿐이라고 했다. 조금만 일찍 일어나면, 더군다나 주말에는 업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용돈 걱정을 덜어주었던 꽤 괜찮은 일터였다.
집을 나서면 뒷산으로 이어지는 나무들이 총총히 서있었다. 흙냄새가 코 끝에 닿는 기분이 좋았다. 아무도 없는 동네를 혼자 걷는 느낌도 특별했다. 텅 빈 길은 새들이 메꿨다. 어떤 때는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가 또 어떤 때는 띄엄띄엄 구슬픈 소리를 냈다. 새들은 이름 모를 풀들이 몸을 흔들어댈 때처럼 ‘여기 있다고, 변함없이 살아내고 있다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고요함 속에서도 계속되는 생의 순간들이 와닿을 때마다 나도 자라나는 기분이 들었다.

새벽의 걸음들은 방학에도 이어졌다. 학원을 마치고 나면 마트로 가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는 치약 담당이었는데, 매대를 채우고 정리하는 일을 비롯해 제품을 홍보하는 업무도 주어졌다. 기능성 알갱이가 들어있는 치약을 어떻게 팔아야 할까 고민하다가 아크릴 판을 준비했다. 투명한 판 위에 치약을 짠 다음 직접 알갱이를 보여주며 주절거렸다. 치약코너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꽁무니마다 따라붙는 모습이 가상했는지 판매량이 훌쩍 올랐다. 벌써 25년 전인데 방학 기간만 일을 하고 이백 가까이 벌었으니 돈 버는 보람을 마트 아르바이트를 통해 알게 된 샘이다.
그곳에는 재밌는 사람들도 있었다. 분유 코너에서 일하는 동갑내기는 매일 증정품을 몇 포씩 들고 와 나눠먹자고 했다. 진한 우유맛이 달큼하고 꾸덕하게 달라붙었다. 분유가 그토록 맛있는 식품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아침마다 몇몇의 사람들이 분유 중독자처럼 친구를 찾곤 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해 칫솔을 판매하던 막내는 라면 매대에서 일하는 남자직원에게 반해서 미소천사라는 별명을 붙여 놓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호들갑을 떨었다. 미소천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브리핑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했는데 그가 휴무라 출근하지 않은 날에는 종일 시무룩해서, 보고 있는 나도 어깨가 내려갔다.
매일 내게 눈이 작다며 그 눈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냐고 시비를 걸면서도 무거운 상자를 기꺼이 들어주던 삼촌도 있었고, 점심시간이면 자판기로 데려가서 “아무거나 눌러봐라” 하던 이모도 있었다.
분유 코너의 동갑내기는 거제도에서 가정을 꾸렸고, 막내는 대구로 시집을 가서 어느덧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아주 가끔이지만 소식을 전해올 때마다 노래가 절로 난다. 짧게 만났어도 오래 애틋할 수 있는 것은 사소한 몸짓에도 웃음이 터지고 말았던, 홀쭉한 주머니를 하고도 구겨지지 않았던, 재지 않고 음을 주고받았던 시절의 우리들이라 그런 거라고. 지나치지 않고 서로의 반짝임을 알아봐 준 것이 여태 고맙다.

대학에서 배움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새벽은 가까이 있었다. 졸업 작품을 준비하며 밤샘 작업을 하던 중, 쏟아지는 잠을 밀어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멀리,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자동차가 파도 소리를 내고 있어도 익숙한 흙냄새가 났다. 어둠 속에서 나무들이 일렁일 때마다 산뜻한 바람이 얼굴을 씻어주었다.
흔한 MT 한번 가본 적 없는, 발을 동동 굴려야 다닐 수 있었던 대학이지만 나는 ‘입학금만’의 다짐대로 졸업을 했다. 그리고 수많은 새벽을 지나 만난 사람들은 자랑이자, 재산으로 남았다.
살면서 열정이 필요할 때는 나를 자라게 해 준 새벽을 떠올린다. 검푸른 공기 속으로 걸음을 옮기면 자주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날은 새로운 길에 첫 발자국을 찍는 느낌이 들고, 어떤 날은 선물상자를 먼저 뜯어보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위로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무사히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일은 조금 일찍 일어나 봐야겠다. 여름을 보내고 가을로 막 들어선 새벽은 얼마나 투명할까. 푸른 새벽을 걷다가, 동동거리며 스쳐 지나는 청춘을 만나게 되면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내야지. 잘 자라나고 있다고. 곧 아침이 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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