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이 노르스레 오그라들었다. 꽃다발 같은 수국을 보면 평범한 하루가 선물처럼 안겨왔다. 가을이 시작되는지도 모르고 말복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덥다 더워 고시랑대는 동안 수국은 의젓하게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날이다. 한 계절을 같이 보냈는데, 안녕이라는 말로는 모자란 것 같아 자그만 선물과 함께 짧은 편지를 썼다.
도서관에서 초등학교 아이들과 웹툰 수업을 한 지 5년 차에 접어들었다. 한참 사춘기를 보내는 청소년 반에서는 “뭐 그리노?”하면 마지못해 “그림이요”라는 답이 돌아올 정도로 삭막하다는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다.
또랑또랑한 아이들의 눈빛은 늘 봄볕이다. 봄볕 아래서는 이름 모를 풀들도 용기를 내고, 막돼먹은 바람도 발끝을 들어 살금거린다. 무엇이든 해낼듯한 눈빛들이 나를 따라다닌다. 그 눈빛에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많다.
수업을 하는 동안 아이들도 자라고 나도 자란다.
편지의 마지막은 ‘서로 멋진 사람이 되어 만나자’는 말로 마무리를 했다.
같은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는 동료로 만날 수도 있다. 또 어디쯤에서는 그들이 나에게 길잡이가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함께 꿈을 나누었던 시간을 접어 아이들의 손에 쥐여주었다.
맑은 하늘에 느닷없이 비가 내린다. 흐릿했던 풍경들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빗방울을 이고 진채 살랑이는 잎들을 보고 알게 되었다. 덜 자란 녀석들이 눈에 밟힌 게지. 오랜만에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산뜻한 흙냄새가 반갑고, 이따금씩 커튼을 흔드는 바람이 고맙다. 풀벌레 소리가 저무는 하루를 위로한다. 여름이 이토록 다정한 계절이었다는 것을 끝자락에 와서야 깨닫는다.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을 어떻게 보내주어야 할까. 계절을 보내는 것에도 준비가 필요하다.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무심히 던져놓은 말들, 나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사진처럼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못난 얼굴로 서 있던 날도 무수하다. 나이를 먹어도 실수는 여전하고, 갚아야 할 마음들만 그득 쌓였다. 후회가 앓는 소리를 하고 튀어나온다. 먼 곳으로 가는 더운 바람에 놓아주어야 할 상념들을 실었다.
그 자리에 오래 기억하고 싶은 여름의 정경을 담아본다. 메뚜기를 구경하느라 한참을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아이들의 뒷모습, 데이지가 가득 핀 꽃밭을 30년 지기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가로지르던 날, 현관 앞에 놓여있던 간식 꾸러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깡통 열차에 몸을 구기고 앉아 즐겁게 달려가던 보롬왓의 풍경... 그저 그렇게 별일 없던 날들이라서 고마운 여름이었다. 내년에도 눈이 부시게 돌아올 계절이지만 서로 다른 모습으로 마주할 것을 알기에 못내 아쉽다.
여전히 여름이 한창인 서랍을 열어 짧은 옷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본다. 남겨둘 것들, 나눌 것들, 버려야 할 것들.. 한 계절의 이야기가 묻은 옷을 비우고, 쌓인 먼지들을 닦아냈다. 여름이 다정하게 다녀간 자리, 오는 가을도 따뜻하게 머물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