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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테크리스토르 Feb 22. 2019

우리는 '자유'가 오해받는 시대를 산다.

- 영화 '독재자' 를 보며 떠오른 쓸 데 없이 소중한 생각 한 줄

위대한 독재자 The Great Dictator, 1940  


영화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 1940>에는 찰리 채플린이 1인 2역으로 연기하는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평화를 사랑하고 제국주의의 압제와 핍박으로부터 자유를 꿈꾸는 평범한 유태인 이발사와,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명 높은 독재자 힌켈이 그들이다.

채플린이 연기한 극과 극의 두 주인공은 저마다 각기 다른 이유에서, 각기 다른 모양의 '자유'를 꿈꾼다.

이발사는 사랑하는 여인과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상을 즐길 수 있는 지극히 소박한 자유를, 독재자 힌켈은 세계 정복을 통해 무릎 꿇린 나라들에게 부여할 강력히 통제된 범위의 자유를...



<위대한 독재자>는 1940년 개봉 당시 나치 독일과 그 점령국가들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는데, 오랫동안 채플린의 팬이었던 히틀러가 포르투갈에서 몰래 필름을 들여와 자기 방 안에서 연속으로 두 번이나 이 영화를 감상했다고 전해진다.  웃으며 볼 수 있었을까? 과연 그는...

오랜 팬이었던 채플린의 영화였지만, 자신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영화라는 이유로 상영의 자유를 통제했던 히틀러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히틀러는 이 결정으로 인해 좋아하던 채플린의 작품을 감상할 스스로의 자유마저 박탈하게 되어 몰래 문을 걸어 잠그고 봐야 하는 것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영화 '위대한 독재자' 중에서_ 힌켈로 오인받아 연단에 오르는 이발사의 당황한 모습 뒤에 자유 Liberty 란 글귀가 선명하다) 

영화의 막바지, 이웃한 나라 오스테를리히국(오스트리아)를 침공한 후 독재자 힌켈을 맞이하는 점령지 환영식 연단에 'Liberty'라는 글귀가 선명하다.

'자유'다.

우리가 너희를 정복하였으니 너희는 이제 자유를 얻었다는 주장의 선포다.

독재자 힌켈이 꿈꾸는 일방적이고도 폭력적인 정복자가 부여하는 '자유'다.

왜 'Freedom'이 아니고, 'Liberty' 인지 궁금했다.

'자유'라는 단어는  영어에서는 두 가지로 단어로 조금 다른 뜻을 가지는데 한 번 눈여겨 볼 만 하다.


Freedom은 타인이나 특정 권위의 통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Liberty는 어떤 사회나 국가의 구성원들이 정부로부터 보장받아 공통으로 소유하고 있는 권리의 총합을 의미한다.
Freedom이 국가나 타인으로부터 얻어내는 것이라면 Liberty는 사회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며 사회구성원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부여해 공유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집회의 자유는 일반적으로 Freedom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Liberty의 한 측면이다.
Freedom은 다른 누군가의 Freedom과 충돌할때 성립되지 않는다. 당신은 담배를 필 Freedom이 있지만 담배연기를 흡입하지 않은 나의 Freedom이 당신의 Freedom과 충돌할때의 담배 필 자유는 성립되지 않는다. Liberty는 이러한 구성원간의 상충이 전혀 없다. 나의 Liberty는 당신의 Liberty를 절대 제한하지 않는다.
보수주주의자들도 전통적으로 Liberty를 지지한다. 하지만, 그들은 일련의 Liberty가 아닌 Freedom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Liberty가 아닌 자유들도 옹호하려고 한다. 그들 자신이 언젠가 잠재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하기 위함)이다.
출처 : 
http://www.naciente.com/essay36.htm 



독재자 힌켈이 점령국에게 보장해 주는 것은 자유(Liberty)다.

그리고, 점령국의 국민들이 독재자 힌켈로부터 다시 회복하고 쟁취하고자 투쟁할 목표 또한 자유(Liberty)다.

똑같은 자유(Liberty)지만, 이 둘은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진다.

각 개인이 누리는 자유(Freedom) 또한 큰 차이를 갖는다.

대개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억압당한 채 산다고 믿는다.

북한의 주민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자유가 보장된 지상낙원에 살고 있다 주장한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진 정권이 그어놓은 선, 그 폐쇄적인 사회 안에서 형성되어 구성원 서로가 서로에게 부여하고 공유하는 자유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무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에겐 그 최소한의 자유 이상의 것들을 요구하고 투쟁해 쟁취할 시민의 자유(Freedom)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차이를 갖는다.




지난 겨울의 촛불집회는_ 피값으로 세워 올린 자유민주주의의 수준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분노였다.

얼마 전,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쟁취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촛불들의 자발적 행동을 보았다. 

그것은 보다 높은 수준의 자유(Liberty)를 보장받고 쟁취하기 위해 행동한 스스로의 의지, 곧 자유(Freedom)로운 의사표시였다.

대한민국이 피 값으로 쌓아올린 민주주의와 자유(Liberty)의 수준을 수십년 전, 아니 그보다 더 바닥까지 내동댕이 친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그들을 광장으로 이끌었었다.

수 십년의 피 땀 어린 국민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끌어올린 자유 대한민국을 힌켈의 나라, 동토의 북한이 이야기하는 자유 마냥 곤두박질치게 만든 것에 대한 분노였었다.



태극기 집회_ 우리 국민은 자기 목에 개줄을 묶어달라 요구한 적 없다. 그 줄 할배들이나 단디 묶으소

또한 지난 겨울, 우리는 똑같이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를 외치며 거리에 나섰던 노년의 태극기 노인들을 본 바 있다.

그들이 목청 높여 외치고 요구하던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요구한 것은 놀랍게도 '계엄령 선포' 와 '빨갱이 싹쓸이'였다.

체제의 자유(Liberty) 수호를 위해 개인의 자유(Freedom)를 제한하던 과거로 회귀하자 외치던 그들을 보며, 독재자 힌켈의 연단 뒤에 아로새겨져 있던 '자유(Liberty)'가 떠올랐다.

더 많은 자유(Freedom)을 쟁취하기 위해 피흘려 투쟁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렇게 요구하고 쟁취한 자유의 조각들을 사회가, 국민이, 시대가 합의하고 동의해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자유(Liberty)가 지금껏 우리가 누려온 수준 높은 그것이었다.

'어버이'라 이름붙인 깃발 아래 태극기를 두르고 목청껏 요구해대던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그 자유는 힌켈이 평범하게 살던 이웃국가의 논밭을 짓밟고, 사람을 가두고 때리고 죽이며 입닫고, 귀닫고, 눈 감고, 이 정도로도 충분히 살만하다, 이 만큼이어도 너희는 충분하다 재단하고 줄여 던져준 그런 '자유'였던 것을 왜 할배들은 모르셨던가...



많은 사람들의 자유Freedom를 위해 더불어 투쟁했고,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소외없이 동의하고 합의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자유Liberty가 전제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이 땅 위에 뿌려졌다.

자유가 오해받는 시대,

피 값 치르며, 개인이 보장 받을 수 있는 자유(Freedom)의 범위를 넓히고 새로이 만들어내며 그것을 사회적 제도 아래 뿌리내리도록 힘 쓰고 사라져간 고마운 영령들을 욕보이며 시대를 역행시키려 하는 이들의 독선과 방종을 바라봐야 하는 오해의 시대.

너희는 몰라, 내가 살았던 시대는... 이라고 그동안 합의되고 동의해 만들어져 온 민주주의의 자유를 마음껏 자유롭게 묵살하는 오해의 시대.

과거 시대의 자유를 추억하지 마라. 그 시대로 돌아가자 말하지 마라.

과거를 딛고 현재가 있고, 현재를 딛고 일어서야 미래를 향한 진보가 시작된다.

Freedom이든 Liberty든... 지금, 오늘의 역사에서부터가 다시 진보를 향해 나가갈 시작점이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영화를 보던 히틀러는 무척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평소같으면 와하하하 박장대소하며 "채플린의 풍자는 정말 날카롭기 짝이 없군" 탄복하며 감상했을 그 영화가 풍자하고 있는 세상 어리석은 독재자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그 풍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을 느끼며, 히틀러는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monte-chris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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