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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Jan 02. 2023

길거리 토스트가 그리울 땐 로티 존

말레이시아에서 만나는 길거리 토스트

추운 겨울 하루, 아버지가 서울에 출장을 오셨었다.

자취하는 딸의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각자의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 토스트 노점이 보였다. 고소한 냄새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에 이끌려 걸음을 멈추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에 코도 발도 꽁꽁 얼었지만 아버지와 나는 거기 그렇게 서서 토스트를 먹었다.

유난히 기억에 남는 아침이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그날 아침 토스트 맛있었지."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 내가 느낀 걸 아버지도 느끼셨구나 싶어 새삼 가슴 한편이 울렁, 했었다.


길거리 토스트는 출근길에 자주 먹던 아침이었다.

브랜드가 붙은 프랜차이즈 토스트도 고급 재료를 넣은 샌드위치도 아닌, 이름 없는 노점 토스트가 가장 좋았다. 버터 대신 값싼 마가린을 쓰고, 세련된 수제 소스가 아니라 케첩과 설탕을 뿌려야 제맛이 났다. 촌스럽지만 든든한 맛이었다. 직장인 시절의 아침 한정 소울 푸드였다.


어느 날 말레이시아에서 길거리 토스트를 만났다.

국립공원 입구에 자그마하게 마련된 식사 공간에 있는 작은 노점에서였다. 갖은 과일 주스, 사테, 락사, 첸돌처럼 현지인들이 사랑하는 간식거리들이 모여 있었다. 많은 음식 중에 딱 그 냄새에 끌렸다. 고소한 마가린에 노릇노릇 익어 가는 빵 냄새. 무심하게 썰어 넣은 채소 조각과 푸짐한 달걀. 간단한 재료지만 기본에 충실한 맛. 한국의 길거리 토스트보다 조금 더 기름지고 조금 더 자극적인 것이 동남아시아스럽다고나 할까.



Taman Warisan Pertanian의 노점 광장과 정상에서의 풍경



주문을 하려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발짓을 총동원했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영어가 공용어처럼 쓰인다고들 하지만, 노점이나 마막 집은 그렇지 않은 것을 여기에 와서야 알았다. 간단한 말레이시아어 정도는 공부했어야 했는데, 그게 예의인데, 뒤늦게 후회를 했었다.

몰랐던 것이 또 있었다. 알고 봤더니 그 가게는 노점이긴 했으나 로티 존(Roti John)이라는 유명한 토스트 프랜차이즈였던 것이다. 누가 부러 속인 것도 아니고, 저 혼자 길거리 토스트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던 것뿐인데 괜스레 배신감이 들었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길거리 토스트 노점이 눈에 띄게 줄어 가는 것을 느꼈었다. 학교 앞 달고나나 여름의 설탕차, 겨울의 풀빵과 군고구마 노점이 사라지듯 조용히 자취를 감추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김밥 한 줄, 라테 한 잔, 혹은 사과 하나로 아침을 대체했지만 꽤 오래도록 아쉬웠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시간이 흐를수록 익숙해졌고 무심해졌으며 그렇게 잊혔다. 길거리 토스트는 내겐 추억의 음식이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 길거리 토스트를 만난다.

한 입 베어 물면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오금동 성내천의 산책길이, 지각할까 아침을 차려 먹을 엄두도 내지 못하며 종종걸음을 쳤던 백석동 지하철 길목이, 퇴근길 지친 어깨를 애써 추스르며 광역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이, 수능시험을 끝내고 친구와 생애 첫 바다여행을 떠났던 기차역이, 따뜻한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었던 그 모든 장소와 시간이 스치듯 지나간다.

추억의 음식이 말레이시아에 있었다.

마들렌 대신 토스트로 만나는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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