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에서 방충망 없이 살기
동남아시아에서 살아 간다는 것은 벌레와의 공생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아니, 공생이 아니라 공습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365일 모기는 일상이다. 조금만 방심하면 개미 떼가 줄지어 광활한 거실을 이동한다. 각자 자기 덩치보다 큰 먹이를 지고 한 줄로 나아가는 모습이 마치 다큐에서 보던 실크로드의 낙타들 같다. 짝짓기 철이면 손가락 마디 하나만 한 수개미들이 불빛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와 찰나의 몸부림 끝에 추락한다. 창틀이나 그늘진 곳엔 수시로 거미가 집을 짓고, 그 아래엔 알맹이만 빼어 먹고 버린 껍데기가 뒹군다. 밤에 갑자기 딱! 딱! 하고 벽이나 천장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살펴보면, 둥그런 등딱지가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딱정벌레가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머리를 부닥치고 있다. 그래서 '딱'정벌레인가 싶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볼까 싶어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면 이게 정말 생명체란 말인가 싶은 먼지다듬이가 후다닥 도망가고 합판 가구에서는 나방 애벌레가 꿈틀거리기 일쑤다. 벌레가 많아서 그런지 도마뱀도 심심찮게 출몰한다. 그래도 도마뱀에겐 귀여운 구석이 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은, 한소끔 끓인 후 식히려고 놓아둔 미역국 냄비를 덮고 있던 개미 떼였다. 두 번째로 충격적이었던 일은, 화장실 바닥에 괴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까만 덩어리를 발견하고 기겁하여 물을 부었더니, 죽은 도마뱀을 뜯어 먹고 있던 개미 떼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세 번째로 충격적이었던 일은, 5성급 호텔 조식 뷔페에 갔을 때 식탁 위까지 올라온 바선생님이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충격적인 벌레의 공습은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나다. 저 모든 일들을 겪고도 벌레를 죽이지 못한다. 물리적인 접촉이 싫기도 하지만, '죽인다'라는 행위의 거부감이 더 크다. 무슨 고고하고 대단한 박애주의자랍시고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하냐 해도 할 말이 없다. 어쨌든 살인범이나 강간범, 아동 학대범 같은 범죄자들을 보고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방법으로 서서히 죽어 가게 놔둬도 시원찮다'라고 저주를 하면서도, 사형 제도는 반대하는 모순적인 인간이 바로 나다. 이 글을 쓰면서도 '벌레'라는 단어 자체가 멸칭으로 느껴져 좀 더 중립적인 표현은 없나 찾아보았다. 하지만 벌레는 벌레였다. 곤충이나 절지동물은 벌레의 하위개념일 뿐으로, 마땅히 대체할 단어가 없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벌레'의 유의어를 무려 '버러지'라고 표기해 놓았다.
말레이시아에서 이토록 오래 살면서도 벌레 한 마리 잡지 못하는 처지지만, 그 때문에 최대한 벌레가 침입하지 못하게 조심하고 있다. 음식물이라면 밥풀 하나, 과자 부스러기 하나 흘리지 않게 조심한다. 먹은 자리는 바로바로 치운다. 창가나 현관문 틈엔 정기적으로 약을 뿌리고, 부엌과 화장실에는 뜨거운 물을 흘려보낸다. 이렇게 하면 '기어 다니는' 벌레는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날아다니는' 벌레는 방충망밖에 답이 없다. 그도 아니라면 많은 한국인들이 그러듯, 신축 아파트를 찾아, 그중에서도 고층을 찾아 자주 이사를 다녀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방충망 없이 낡은 집에 6년째 살고 있다. 아무리 날벌레가 싫어도 이사를 가거나 방충망을 달지 않는 이유가 있다. 창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방충망을 통해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빛깔도, 구름의 투명함도, 멀고 가까운 나뭇잎의 살랑거림도 온전히 눈에 담지 못한다. 번역을 하다가 막힐 때, 단어 하나가 떠오를 듯 말 듯 도통 손에 잡히지 않을 때, 혼자 밥을 먹다가 문득 쓸쓸해질 때, 그럴 때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맑으면 맑은 대로 좋고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좋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았다. 서늘하도록 푸른 낙뢰를. 기왓장이 떨어질 정도의 스콜에 가슴이 뻥 뚫렸다. 아침이면 평화롭게 지저귀는 새소리에 깨는 낭만도 경험했다. 한편으론 '구슬프게’ 우는 새 소리가 이런 것이구나 알게 되었다. 3개국 10여 개의 도시를 떠돌며 사는 동안 이렇듯 자연 가까이 둥지를 튼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니 어떤 날이면 벌레와 공생한들 뭐 어떠랴 싶기도 하다.
말레이시아에서 처음으로 계약한 집에 방충망을 설치하기 위해 사람을 부른 적도 있었다. 그때 순박한 말레이시아 청년이 그랬었다. 이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해할 수 없다고, 너희는 왜 창에 방충망을 치냐고, 벌레는 그냥 어디든 있는 거라고, 원래 그런 거라고, 벌레와 함께 사는 건 당연한 거라고.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때 그 청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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