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증은 덤
출판사 신입 편집자 시절, 오타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가 아주 심했다. 특히 표지 작업을 할 때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인쇄 전 출력물을 서너 번씩 확인하고, 선배 후배 동료 모두 교차 교정을 보지만 불안함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무려 표지 제목에 오타가 나거나 저자나 역자 이름이 틀리는 경우에는 대재앙이다. 표지갈이에 드는 비용은 차치하더라도, 책을 받아 들고 잘못된 이름을 확인할 저역자에게 고개를 들지 못할 사고다. 담당 직원이 경위서를 썼다는 둥, 편집자들이 모두 창고에 가서 스티커 작업을 했다는 둥, 무시무시한 출판사 괴담은 괴담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이 진정한 공포랄까. 나 역시 십여 년간 출판사에서 일하며 종종 그런 경우를 목격했으니 말이다. 다행히 '실수'는 했어도 '사고'를 내 본 경험은 없지만 가뜩이나 타고난 예민함에 강박증 비슷한 것을 얻었다. 사실 중증이든 경증이든 편집자에게 강박증은 언젠가는 발병할 수밖에 없는 직업병이다.
언젠가 출력소에서 표지를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 마침 옆에 서서 나란히 필름을 확인하던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님 경력쯤 되면, 오타에 대한 불안감은 사라지나요?"
그러자 선배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것 같죠? 아니, 편집자는 평생 그래요."
아, 평생 그래야 하는 거구나.
그날의 그 대답이, 선배의 말투가, 필름 출력기가 웅웅 돌아가던 소음이, 어슴푸레했던 형광등 불빛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다.
그래서일까, 출판 편집 일은 즐거웠고 그만큼 내 적성과 재능을 살릴 수 있는 다른 직업은 없을 것을 확신했지만 편집자를 그만두던 날 일말의 해방감을 느꼈다. 고질적인 직업병에서 벗어난다 싶었다.
그런데 웬걸, 이제는 번역서 출간이 코앞에 다가오면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느끼게 되었다. 적어도 번역자가 되면 편집자보다 원고 보는 횟수만큼은 줄어들 줄 알았다. 편집자가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초교, 재교, 삼교, OK교까지 대략 네 번 원고를 읽고 확인한다면 역자는 한 권의 책을 받아 들기 위해 일독, 초벌 번역, 퇴고 1~2, 역자 초교, 역자 OK교까지 대여섯 번의 과정을 거친다. 관사, 부사, 명사, 형용사, 동사 할 것 없이 단어 하나하나 고심하여 번역어를 고른다. 잘 알지 못하는 분야라면 용어와 표현에 실수가 없도록 해당 분야의 사전, 책, 때로는 영화까지 참고한다. 편집자를 하던 버릇 때문에 보조용언 띄어쓰기부터 외래어 표기법까지 확인하는 것은 덤이다.
그럼에도 내 눈과 뇌가 놓쳤을지도 모를 오역이 있을까, 표지의 오타도 못 보고 지나치게 만드는 하찮은 인간 DNA가 농간을 부리진 않았을까, 참을 수 없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아직 베테랑이라 불릴 만큼 많은 번역을 하지 못해서일까, 베테랑이 되면 이 불안과 강박은 사라질까 알 수 없다. 어느 선배 번역자께 여쭈면 이렇게 대답할 것도 같다.
"그럴 것 같지? 아니, 번역자는 평생 그래."
오타 없는 책은 없다.
오역 없는 번역서는 없다.
모든 책에는 저마다의 운명이 있다.
책을 업으로 일하며 누구보다 절절이 공감하게 된 출판계 명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도전해 보고 싶은 것이다. 오타 없는 책을 만들기를, 오역 없는 번역을 하기를, 나를 만난 이 글과 책의 운명이 빛나기를.
오늘도 나의 강박증은 이렇게 여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