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자랐던 장흥의 추억
내가 아주 어린시절의 기억이다. 전라남도 장흥군이라는 시골에서 살고 있었는데
아빠는 면사무소로 출근하였던 공무원이셨고 나의 어린시절, 엄마는 재주가 많아서 시골이지만 여러가지의 부업을 하셨던 것 같다.
내가 8살이 되던해에 광주로 이사를 왔는데, 그 이전에는 장흥군의 시골초등학교 바로 옆의 기와집에서 자랐다. 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의 일이라 가물가물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골집은 큰방과 옛날식 부엌이 있었고 큰방의 문은 창호지였다. 나무창살사이로 하얀색 창호지가 붙어 있었고 그 창호지는 손가락으로 아이들이 찔러서 구멍이 나 있었고, 어떤 구멍은 종이로 막아져있었고 당시에는 밥풀을 사용하던 시절이다. 종이에 흰 밥풀을 올려놓고 손으로 뭉개면 풀이 되었다. 우표를 붙힐 때나 집에서 종종 풀이 필요할때는 밥풀을 사용했다. 암튼 밥풀로 종이를 이용해 구멍이 메워진 곳도 있었고 아닌곳도 있었다. 나 역시 호기심에 손가락으로 뚝 찔러서 창호지에 구멍이 나게 놀았던 기억이 난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창호지 한장을 사이에 두고 그 밖은 그냥 바깥이었다. 당시에 할머니가 토방?이라고 하셨던 나무마루가 바로 연결이 되었고 그 아래는 그냥 마당이었다. 지금도 가끔씩 신기하다. 추운 겨울에도 종이한장으로 버텼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기억들이 그리 힘든 기억이 아니라는 사실이.
작은 방에 있던 크게 난 네모난 창문을 이용해 작은 문구점을 했던 기억, 기와집근처 항아리가 있던 모퉁이에서 벌꿀을 채취하는 네모난 통을 키웠던 일, 그리고 집에서 커다란 병아리부화기가 작은 방에 있었던 기억이 난다.
작은방에 부화기가 있었고 그 방은 따뜻하게 난방을 해서 일정 온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가끔씩 부모님이 기계를 조작하기 위해서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나도 따라서 들어갔다. 그러면 방에 가득하게 병아리들이 사람에게 다가왔다. 삐악삐악삐악! 그 귀여운 병아리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어린시절의 놀라운 기억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너무나도 많은 인산인해의 병아리들을 내가 실수로 밟을까봐 조마조마하면서 기계까지 엄마를 따라들어갔던 기억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 시절 그 많던 병아리들을 어떻게 해서 부업을 했는지, 나중에 그 병아리부화기는 어떻게 처분이 되었는지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노란 병아리가 왜 아직까지도 기억이 남는지.
시골에서의 병아리에 대한 아쉬움은 저학년때 병아리를 키운다고 사온 일로 연결이 되는 것 같다. 나중에 광주에 이사를 오고나서, 학교가 끝날때면 학교근처 육교아래에서 하얀 봉지에 병아리를 팔던 아저씨들에게 몇번을 병아리를 사서 집에와서 키운다고 했던 기억과도 연결이 된다. 몇번을 키우려고 했는데 잘 키우지를 못했다. 그 기억은 우리집의 고양이와 참새이야기로 연결이 된다.
할머니가 시골에서 고양이를 가끔씩 데려 왔다. 아주 작고 귀여운 아기 고양이. 고양이는 우리 남매가 기르는 병아리를 호시탐탐 노렸고 우리가 딴곳에 신경을 쓸 때 번개같이 날아와 병아리를 채가서 주택 마루아래에 공간으로 데리고 가서 우리 남매를 애태웠다. 불쌍한 병아리를 구하려고 계속 쳐다보던 기억
고양이는 주택 이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도 몸을 숙이고 있었다. 이층에 놀러와서 잠시 걸어다니는 참새를 잡는 묘기를 보이기도 했다. 우리 고양이는 참새엮시 낚아 채서 아지트인 마루바닥으로 데려갔다. 고양이와 참새, 그리고 병아리 모두 초등학교 시절 주택에 살던 때의 잊어지지 않는 순간들 인것 같다. 이제는 희미한데 한번씩 생각이 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이 되니 참 신기한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