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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옥이네 Apr 06. 2020

“‘끝’은 끝이 아님을…… 우리는 계속 나아갑니다”

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 이끈 ‘조례만드는청소년’

"조례 제정 실패했지만 경남 청소년 운동 계속 이어갈 것"


수많은 청소년 운동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이 아닐까 싶다. 2010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광주광역시, 서울특별시, 전라북도에서 제정된 학생인권조례는 보수 개신교 단체 등을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일어나며 논란과 갈등을 빚어왔다. 학교교육과정 속에서 학생의 인권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임에도 불구하고, 학교 밖의 반대 여론에 밀리고 밟혀온 역사를 갖고 있는 것.

이 조례 제정의 시작이 경기도인 탓인지, 세상은 원래 승자만 기억하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이 운동을 다루는 미디어조차 서울과 경기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보통 ‘학생인권조례’ 하면 수도권 지역을 먼저 떠올리기 쉽다. 아직 조례를 제정하진 못했지만 끝없는 운동을 이어가고 있는 지역이 있는데도 말이다.

만18세 선거권 하향 소식을 들으며 떠올랐던 단상들, 그 가운데 ‘조례만드는청소년(조청)’이 있었다. 2018년과 2019년 경상남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을 치열하게 펼쳤던 이들이다. 2008년부터 시작된 경남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은 결국 좌절됐지만, 10년의 운동을 이어온 데 조청과 같은 지역 청소년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 시사 하는 바가 크다. 만18세 청소년 유권자가 투표소로 향할 올해 총선을 앞두고, 조청은 자신들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또 이 활동이 어떻게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 당사자들의 전망을 듣고 싶기도 했다. 그런 궁금증을 안고 지난 2월 16일 창원대학교 근처 한 카페에서 조청 활동가 4명 △귀홍 △마파 △이글 △지혜를 만났다. 기사에서는 이들의 본명 대신 활동명으로 표기함을 밝힌다.

경남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요구하는 집회 현장. <조례만드는청소년 제공>



▮’어느날 갑자기’가 아닌
2008년 경남교육연대 학생인권조례 TF팀, 2009년 경상남도 교육위원회에 경남학생인권조례안 전달 및 정식 발의 청원, 2011년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경남본부 출범…….

월간 옥이네가 만난 경남 학생인권조례 운동의 당사자는 ‘조청’이다. 하지만 조청에 앞서 훨씬 많은 활동가와 운동의 역사가 경남에 있다. 이글 활동가는 앞서 10년이 넘는 세월이 쌓여 경남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비롯한 청소년 운동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경남 안에서도 청소년 운동 흐름이 생겼다가 없어졌다가를 반복해요. 조청의 경우 2017년 새롭게 운동을 이어가보자고 모이게 된 ‘경남청소년행동준비위(경청행)’에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경청행은 2017년 11월부터 2018년 6월까지, 그러니까 지방선거 때까지 활동을 했어요. 당시 진보교육감 2기(현 박종훈 교육감 재선)를 맞게 되는데, 교육감은 앞선 임기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관련해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어요. 교육감은 조례 제정을 공약으로 내걸고 재선에 성공했고, 저희도 본격적으로 이를 추진할 움직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렇게 ‘조례만드는청소년’이 꾸려지게 됐죠.”

그즈음 경남교육연대를 중심으로 100여 개 시민단체가 모인 ‘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촛불시민연대’ 청소년 분과로 활동했던 경청행이 본격적인 조례 제정을 위해 ‘조례만드는청소년’으로 새로운 활동의 장을 연 것이다. 2018년 9월, 그렇게 10여 명의 청소년이 모여 조청의 닻을 올린다.
 
▮경남학생인권조례는 어떻게 폐기됐나
그해 10월 경남교육청은 경남학생인권조례안을 입법예고한다. 오래도록 지역 현안이었던 데다 교육감의 공약이기도 했기에, 여기까지만 보면 꽤 수월하게 일이 추진되는 듯 했다. 하지만 대형 개신교회를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의 활동 역시 만만치 않았다. 도교육청 홈페이지에 반대 글을 대량 게시하고 전화와 메일을 마비시킬 정도로 상당한 양의 의견서를 제출하는가 하면, 의견수렴 공청회에 대거 참석해 책상을 걷어차는 등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자유한국당 소속 도의원들의 교육감 공격도 이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은 조례안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기 보다 반대 세력의 여론을 막기 위한 대응 활동에 주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조례 운동이 한창 전개되는 시기에 청소년 당사자의 목소리를 담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면서 조청은 2019년 2월부터 ‘경남학생인권조례를 원하는 청소년의 촛불’ 집회를 시작한다.

그러나 반대 세력의 도교육청과 도의회 압박, 여기에 보궐선거 등이 겹치면서 정당의 눈치 보기가 이어져 조례안 제출 자체가 도의회 5월 회기로 넘어가게 된다. 운동 현장 역시 혼란스러웠는데, 반대 여론을 압도할만한 찬성 여론을 만들지 못한 데다 전교조 경남지부 소속 교사들의 탈퇴 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 이들의 활동을 정리한 활동기록집 내용을 보면 당시 조례제정 운동이 갈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던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교육청과 도의회는 각자 무력하고 뻔뻔한 줄다리기에 정신이 없었고, 촛불시민연대는 순진했고, 조례만드는청소년도 그 거리에서 바스러지는 양초에 기대어 차가운 땅과 촛불이라는 이름과 천진난만한 내 옆의 동지에게 속고 또 속은 채 그렇게 다섯 번째 촛불을 들고 있었다.”

그러던 3월, 도교육청은 경남학생인권조례안 수정안을 발표한다. 원안 51개 조항 중 34개를 수정하고 5개를 삭제, 5개를 신설한 안이었다. △신체의 자유 △사상,양심,종교의 자유 △사생활과 개인정보의 보호 △정보접근권 △성(性)인권 교육 등에 각종 단서 조항이 붙으며 수정됐다. 지혜 활동가는 “반대세력의 압박으로 조례안 수정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지만 실제 수정안은 다른 지역 조례안 보다 훨씬 더 많이 후퇴한 것이라 무척 당황스러웠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우여곡절 끝에 맞은 5월에도 조례안은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한다. 도의회 교육위원회에서 자유한국당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일부 의원의 반대로 부결되고 만 것. 당시 도의회 김지수 의장이 직권상정도 거부함에 따라 경남학생인권조례안은 자동폐기 수순을 밟게 된다.
 


조례만드는청소년의 귀홍, 이글, 지혜 활동가.


▮누가 누굴 조종한다고요?
당장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운동을 실패로 규정할 순 없다.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며 10년 넘게 이어진 경남의 청소년 운동이 조청으로 이어졌고, 조청이 만든 경험이 또 다른 운동의 역사로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조청이 좌절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운동의 역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조청은 제정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면밀히 평가하고 기록했다. 자신들의 기록이 이 같은 운동을 이어갈 동료들에게 힘이 되기를 바라며. 그 기록이 바로 지난해 12월 출간된 ‘우리는 진 게 아니라 아직 못 이긴 거야’다. 책에는 조청이 결성된 2018년 9월부터 활동을 마무리한 2019년 11월까지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기간 동안 조청은 총 119번의 회의를 하고 12번의 집회를 진행했으며, 총 4천4명에게서 조례제정 촉구 서명을 받았다. 거리에 나가 외쳐야 했던 시간을 조청 활동가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제정 찬성 서명을 받을 때 와서 시비를 걸거나 옆에서 계속 지켜보는 분들도 종종 계셨어요. ‘너 여기서 뭐하니?’, ‘이거 왜 하니?’ 같은 질문을 던지며 심문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삿대질을 하기도 하고. 위협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죠.(귀홍 활동가)”

“굉장히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사람도 많았어요. 집회에 찾아와 발언을 할 수 있게 요청해놓고선 막상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쏟아 내거나, 기자회견 장소에 찾아와 방해를 하는 식으로요.(이글 활동가)”

“저희는 집회 때 사용하는 설비라고 해봐야 작은 앰프 정도인데, 큰 교회에서 나오는 분들은 엄청 큰 방송차 같은 걸 끌고 와요. 저희가 조례제정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으면 그 소리가 아예 묻히도록 반대편에서 큰 소리를 내죠.(지혜 활동가)”

웃지 못 할 상황도 몇 번 있었다.

“한 번은 땡볕에 서있는데 어떤 분이 ‘어휴, 덥지’ 이러면서 양산을 씌워주시는 거예요. ‘고마운 분이다’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반대편에서 어떤 분이 헐레벌떡 뛰어와 ‘여기 아니야’ 이러면서 그 분을 다시 끌고 가고. 알고 보니 반대집회에 오신 건데 잘 모르고 저희 쪽에 서 계셨던 거죠.(귀홍 활동가)”

청소년을 사회의 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다 보니 활동가들이 ‘어른들에 선동된 불쌍한’ 청소년으로 그려지기도 했다고. 귀홍 활동가는 “공청회 때 학생 패널로 참석했는데 그때 반대 세력 분들이 저를 두고 ‘선량한 학생이 선동됐다’고 표현했다”며 “제 스스로 주체적인 생각을 갖고 나간 것인데 그런 취급을 받으니 굉장히 기분이 이상했다”고 전했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지혜 활동가는 ‘어른’으로 분류된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조청 활동을 알리는 기사 댓글에 ‘얘들아 돌아와라’, ‘누가 이 착한 아이들을 조종하나’, ‘배후세력이 있다’ 이런 얘기가 나와요. 그런 걸 보면 좀 우습죠. 사실 어른들은 아무 것도 안하잖아요? 오히려 저희가 어른들을 조종한다고 하는 게 맞지 않나요?”
 


경남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요구하는 청소년들. <조례만드는청소년 제공>


▮학교를 정치판으로 만드는 게 청소년 운동이 해야할 일
경남 지역 청소년 자치 활동을 이어온 이들은, 선거권 연령 하향에 대해선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지역 청소년 운동의 새로운 장을 기대하고 있을까.

귀홍 활동가는 “조례라는 게 기본적으로 법제화 운동이고 이걸 제정할 권한이 있는 게 정치인들이다 보니 투표권이 없는 청소년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며 “이번에 선거 연령이 하향된 것을 시작으로 계속 청소년 참정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하고 전망했다.

이글 활동가는 낙관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슬프게도 이번 선거는 ‘아무 일도 없었다’로 귀결될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그는 “결국 선거는 조직력 싸움인데 청소년이 영향을 끼치려면 그만큼의 힘을 만들어야 하는 일이라 당장은 쉽지 않아 보인다”며 “다만 그 와중에 학교라는 공간에 정치가 비집고 들어갈 작은 틈이 생겼다는 것 정도가 긍정적인 거 같고, 곧 학교를 정치판으로 만드는 게 청소년 운동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조례만드는청소년 활동기록집 '우리는 진 게 아니라 아직 못 이긴 거야' 표지. <조례만드는청소년 페이스북>


▮"원래 모였다 흩어지며 계속 가는 거니까"
전국적으로는 선거권 연령이 하향되고 언론은 마치 청소년에게 대단한 권리가 주어진 양 이야기한다. 하지만 여전히 스쿨미투가 이어지고 학생인권조례제정은 보수 단체의 반대에 밀려 논의조차 되지 못하는 게 지역의 현실이다.

조례안이 폐기되면서 조청의 운동도 막을 내렸다. 50여 명의 조청 활동가들 내부에서도 이미 실패한 조례 제정 운동을 계속 이어가는 것에 대한 회의가 존재한다. 조청은 월간 옥이네와의 인터뷰가 진행됐던 2월 16일 오후, 공식 회의를 끝으로 해산을 결정했다. 하지만 조청 활동을 통해 성장한 청소년 활동가들과 이들이 꾸려갈 지역 운동은 어떤 형태로든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처음 조청의 목표는 조례 제정이었지만 이제는 그 조례를 넘어 더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다니는 학교는 아직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최소한 내 동생이 다닐 학교는 좀 더 나아지겠지, 하는 믿음을 갖고요.(마파 활동가)”

“조청이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건 경남에서 각각의 활동을 이어왔던 사람들이 자신의 역량을 다 내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창원은 물론 제가 사는 진주를 중심으로 운동을 이어가고 싶고요. 한편으로는 지역별로 이런 움직임이 버틸 수 있도록 지원하는 조직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어쨌든 확실한 건 우리는 계속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는 거죠. 원래 이런 건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이어지는 거니까요.(이글 활동가)”

조청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조청의 이름 뿐, 그 활동이 쌓은 경험과 역사는 지역 속에 다시 녹아들어갈 것이다. 이들의 책 제목대로 ‘우리는 진 게 아니’기 때문에. 




월간 옥이네 2020년 3월호(VOL.33)

글 사진 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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