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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화X역사

“너무 좋은 책 혼자 볼 수 없어서 직접 냈습니다”

‘나단이라고 불러줘’ 번역‧출간한 상어출판사 이나래 씨

by 월간옥이네

책 ‘나단이라고 불러줘’가 출간을 위해 모금을 하고 있다는 소식은 지인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처음 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청소년 FTM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는 말에, 일단 그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후원했다. 그리곤 잊었다. 그러다 3월 초 출간된 책을 손에 쥔 다음에는, 이 책을 만든 사람은 어떤 이일까 궁금해졌다. 후원 페이지에 있던 메일을 통해 현재 프랑스에 있는 이나래 씨와 짧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독자 여러분과 나눈다.




▮상어출판사와 본인 소개를 부탁드린다.



퀴어‧페미니즘에 관련된 프랑스어 서적 전문 출판사다. 출판사 이름인 ‘상어’는 제가 여성주의 운동을 시작하면서 지은 별명이다. 벌써 10년 넘게 썼고, 친구들 대부분 저를 ‘상어’라고 부른다. 그래서 출판사 이름도 익숙한 제 별명으로 고르게 됐다. 출판사 이름이 제 이름이듯, 제가 읽고 좋아하는 책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한다는 마음이 담겨있다.



▮‘나단이라고 불러줘’ 출간 배경이 궁금하다. 책 출간을 위해 진행했던 텀블벅 페이지에 보면 ‘출판사에서 모두 출판 제안을 거절당해 아예 출판사를 차리고 판권을 사버렸다’고 돼있던데.



저는 유명하지 않은 번역가다. 재밌는 책을 번역해도 출판사 의뢰가 없을 땐, 제가 직접 출판사에 연락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나단이라고 불러줘(이하 ‘나단’)’를 발견했다. 읽어보니까 너무 재밌어서 번역 출판 제안서를 만들어 여러 출판사에 돌렸지만 대부분 답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받은 답도 ‘거절’이었다. ‘그래픽 노블’을 다루는 출판사가 적기도 하고, 각 출판사마다 원하는 그림이 뚜렷하다 보니 어려웠던 것 같다.



보통 거절을 당하면 포기했는데, 이상하게 ‘나단’은 오기가 생겼다. “이 책이 얼마나 재밌는데 왜 몰라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인터넷에서 1인 출판 관련 글을 보게 됐다. 비용이나 행정 절차 등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알게 되면서 ‘나단’을 직접 출판해보자 결심했다. 텀블벅 같은 크라우드 펀딩을 활용하면 초기 자본이 많지 않아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으로는 친구들의 부추김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냥 내가 내버릴까?” 하는 한 마디에 다들 “해봐”, “재밌겠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그때가 제가 한국에 한 달 쯤 들어와 있던 시기였는데, 이왕 할 거면 한국에 있을 때 해야 하니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출판사 등록을 해버렸다.




▮출판사 등록을 하고 모금을 하고, 출간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이 어려운 과정을 택한 이유는 뭔가.

‘나단’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진짜 재밌기 때문이다. ‘나단’은 여자 아이로 태어났지만 스스로는 남자라고 느낀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이를 잘 받아주지 않는다. 나단의 엄마는 나단이 레즈비언일 거라 생각하고, ‘여자가 여자를 좋아해도 괜찮은데, 왜 굳이 남자가 되려고 하냐’고 묻는다. 나단의 친구는 나단을 남자로 대하지만, 다툼이 생길 때는 나단을 ‘여자’로 대하며 모욕한다. 나단의 고통은 이렇게 다층적이다. 이걸 ‘재밌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 책이 나단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나단에 대한 독자의 이야기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하게 하는 책만큼 재밌는 건 없다.



'나단이라고 불러줘' 중


그리고 전 이 장면(위 그림)에서 느낀 ‘어른’으로서의 부채감도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저는 차별을 반대하는 사람이고 차별과 싸우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지금 사회에 남아있는 차별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른’에게 무슨 권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쨌든 차별적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충분히 행동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다. 그래서 ‘나단’을 출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있는 수많은 FTM 청소년에게 ‘당신은 괜찮다’는 말을 해줄 사람들과 책이 더 필요하니까.




▮ ‘나단’ 출간 과정에서 힘들거나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어떤 건지 궁금하다.



제 게으름이 가장 힘들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고, 또 제가 다 해야 하는 일인데 이게 제 생업이 아니다 보니 정말 천천히 할 수밖에 없었다. 출판사 연락에 두 달, 번역과 인쇄소 찾는 것에 각각 석 달 이상이 걸렸다. 미루려고 하니 한없이 미루게 되더라. 그러다 보니 일정을 궁금해 하는 ‘나단’ 원서 출판사 담당자와 ‘나단’ 북디자이너가 절 독촉하는 꼴이 됐다. ‘어떻게 되가나요?’ 질문이 오면 ‘언제쯤 끝날 거예요’ 답하고 그걸 마감 삼아 일했다.




▮ ‘나단’은 상어의 첫 번째 출간작으로 알고 있다. 이 다음 도서 출간 계획은.



고민 중인데, 우선 ‘나단’ 일러스트 작가님 책을 내고 싶다. ‘뚜쉐’라는 펜싱 용어 제목의 책인데, 3명의 성폭력 생존자가 펜싱을 배우는 생존자 상담 과정에서 만나는 이야기다. 이것도 ‘나단’처럼 복잡한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공감’ 말고 ‘이해’다. 어쨌든 내가 모르는 상처인데, 같은 경험이 있다고 해도 한 사람의 상처는 타인인 나는 모르는 상처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장미의 계절’이라는 여자 청소년 축구팀 이야기도 있다. 축구 클럽에서 남자팀만 지원하려고 하니까, 여기에 여자 청소년 축구팀이 도전하는 내용이다. 정말 재밌어서 순식간에 읽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이미 판권이 팔렸을지도 모르겠다. 관심 있는 출판사 관계자가 계신다면 제가 연결해드리고 싶기도 하다.


동화책 중에도 좋은 게 정말 많다. ‘할머니 백과사전’이나 ‘엄마가 학교에 갔다!’ 같은. 제목만 봐도 너무 좋지 않은가.


사실 좋은 책은 더 많은데, 출판은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래서 전 번역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출판사에 번역 제안서를 돌려보고, 수락되지 않은 책들만 저희 출판사에서 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월간 옥이네 2020년 4월호(VOL.34)
글 박누리
사진제공 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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