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송전탑, 세월호, 형제복지원… 국보법 피해자까지
기록 통해 기억의 세계 확장하는 인권 기록 활동가 유해정 씨
‘꿀벌은 밀랍으로 자신의 집을 짓지만, 인간은 개념으로 자기 세계를 짓는다.’ 니체의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말과 생각으로 세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간다. 세계를 ‘규정’하는 말과 생각의 타래는, 그래서 정체와 한계를 만들기도 한다. 세계의 확장은 결국 내가 가진 말과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밀양송전탑, 세월호 참사, 화상 피해자, 그리고 장애아동을 키우는 여성과 장애를 가진 여성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더 없이 필요한 이유다. 엄청나게 많은 말이 범람하는 시대에, 그러나 나를 돌아볼 생각의 여지는 부족한 때에, 끊임없이 다른 말과 생각을 마주하며 세계를 확장시켜나가는 이. 유해정(옥천읍) 씨를 만났다. 인권활동가이자 기록활동가로 우리 사회 곳곳의 낮은 목소리를 기록하는 그의 새 작업 소식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여성의 목소리로 듣는 국보법 피해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것을 잊고 산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할 순간이 있다. 그것은 개인이 겪은 한 사건일 수 있고, 역사적인 사실이 될 수도 있으며, 우리 사회가 함께 보듬어 안고 가야 할 상처일 수도 있다. 때로 어떤 것은 이 모든 영역에서 기억해야할 필요를 갖고 있기도 하다. 유해정 씨와 그의 동료들이 계속해서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배경이다. 그들이 이번엔 ‘국보법(국가보안법)’을 화두로 기록을 진행했다.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전시회’다. 2020년, 케케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국보법을 다시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국보법이 인권 운동의 핵심 주제였을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2004년 국보법 폐지 논의가 좌절된 후 지난 16년 동안 한 번도 인권 운동의 주요 의제로 떠오르지 못했죠.”
한창 불붙었던 국보법 논의는 진보진영 내에서도 잊힌 주제가 됐다. 국보법과 그로 인해 고통 받은 사람들의 기억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현재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국보법을 어떻게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들은 집회나 기자회견, 정치권 로비 등 기존 방식이 아닌 ‘문화 운동’으로 국보법 폐지 논의를 불러 내기로 결심했다.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전시회’는 국보법을 박물관으로 보내는(역사에서 퇴장시키는), 국보법 폐지 운동의 새 모습이다.
‘여성 서사’가 이번 전시의 핵심인 것도 주목해야 할 지점. 남성 중심이던 기존 담론에 가려져있던 여성의 목소 리로 당시의 피해와 고통을 기록했다. 남성이 민주화 운동 투사가 되는 동안 그들을 옥바라지 하고 묵묵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엄마, 아내, 딸의 이야기다.
“이 여성들 역시 국보법의 아주 직접적인 피해자예요. 투사가 된 남성들은 출소 이후 운동 진영에서 이름만 대도 ‘우와’ 하는 명예를 얻기도 했지만, 여성에게는 여전히 ‘누구의 부인’ 이상의 위치는 주어지지 않았죠. 우리 사회는 그런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해왔으니까, 그가 가진 피해자성과 주체적 삶에 대한 인정을 받지 못했던 거예요.”
이들의 고통을 이들의 언어로 기록해보자는 데, 유해정 씨를 비롯한 강곤, 박희정, 이호연, 홍세미 씨 등 인권 기록 활동가와 정택용 사진가가 동참했다. 지난해 초반 시작된 기록 작업은 올해 7월 추가 인터뷰까지 빡빡하게 진행됐다. 그럼에도, 다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부인, 엄마라는 위치 때문에 인터뷰를 거절하거나 인터뷰 내용을 상당부분 덜어내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본인이 한 이야기가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을까봐 노심초사하시기도 하고요. 어떤 경우는 자녀가 ‘내 얘기는 하지 말라’고 주문하기도 해요. 그런 관계 속에 여성의 서사가 놓이다 보니 인터뷰 내용의 절반 정도 밖에는 드러내지 못해요.”
가려진 여성의 서사와 사회적 듣기
유독 ‘국보법’이라서가 아니다. 구술 기록 작업을 계속 진행하며 만난 여러 이야기 중에는 아예 책으로도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유해정 씨는 남성과 여성의 ‘경험의 역사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마을 투쟁사를 기록한다고 했을 때, 남성들에겐 땅을 지키고 역사를 지키고 미래를 지키는 투쟁이지만 여성들에게는 그 투쟁 내내 없는 살림을 이끌어 나가는 역사, 주변 연대자들을 위해 열심히 밥을 해주는 역사이거든요. 돌아보면 ‘나’는 없는 시간이기도 한 거죠. 그래서 각자에게 완전히 다른 기억으로 남아요. 그 투쟁의 끝이 패배라면, 남성에게 이것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것과 싸운 사건으로 기억되지만, 여성에게는 해방의 역사가 되기도 하는 거예요. 노동으로부터, 억압적 관계로부터 사회적 해방을 맞이한 사건인 거죠. 하지만 이런 얘기와 함께 하시는 말이 ‘우리 아저씨가 알면 안 된다’, ‘우리 시어머니가 알면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책으로 못나오는 경우도 많아요. 여성들 얘기는 특히 더 그래요.”
아쉬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기록으로 남길 수 없어서가 아니다. 기록을 통해 사회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는 분위기, 즉 ‘사회적 듣기’를 할 기회를 만들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이다. 하지만 이 아쉬움이 구술 당사자가 살아가야 할 세계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 “사건이 끝나도 그 사람은 살아가야 할 삶”이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무엇이든 기록하는 사람은 “그가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해정 씨는 말한다.
기록자의 몫
그래서 기록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 해정 씨의 말처럼 이들의 말하기는 개인적 말하기가 아닌 ‘사회적 말하기’이며, 우리는 이를 ‘사회적으로 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사회적 해결을 도출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사안의 대부분이 문화나 사회적 구조, 혹은 이미 굳어진 관점을 바꿔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구술자들의 실망이나 오해를 사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스스로 기대한 만큼의 사회적 화답이 없을 때 크게 실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때로는 이런 작업이 해정 씨와 같은 채록자의 경력에만 보탬이 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해정 씨는 이것을 기록자의 숙명이라 말한다.
“그 입장에선 당연한 거예요. 작업이 끝난 후 기록자들은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게 되지만, 그는 계속 사건이 있던 그 시공간에 멈춰있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가 갖게 되는 억울함, 분노, 상처는 기록자가 감내하고 가야 하는 부분도 있는 거고요. 여기서 일희일비하게 된다면 다음을 기록할 힘이 사라지니까. 그것이 기록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정 씨는 더불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듣는 일’에 노력이 부족한지 덧붙인다. 사회적 약자의 어려움을 막연하게 알고 있으면서 마치 다 아는 듯한 태도가 그것이다.
“실제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을 얘기해 본 경험이 거의 없거든요. 턱 하나 때문에 하루 종일 이동도 할 수 없는 휠체어 장애인의 삶을 우리가 같이 살아본 적이 없잖아요. 그 누구도 그 어려움을 처절하게 마주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나 알고 있어, 그만해’라고 말하는 거죠. 성소수자에 대한 생각도 그래요. 보통은 2,30대 건장한 성소수자를 떠올리는데 그 생각에서 10대나 6,70대 성소수자는 지워져요. 그런 태도가 사회적 약자로 하여금 더 많은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게 해요.”
해정 씨가 피해자 편에 서겠다는 분명한 입장을 갖고 그의 감정과 사유, 그가 원하는 해결 방식을 듣고 기록하는 이유다. 우리 사회의 말하기와 듣기 대부분, 이미 너무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사회적 초대장
고통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사자에게도, 그것을 기록하는 이에게도. 그러나 어렵게 꺼낸 고통의 덩어리를 우리는 곧잘 외면해버린다. 듣는 것마저 버겁다는 이유로.
돌아보면 해정 씨가 해온 작업 대부분이 그렇다. 밀양 송전탑이나 세월호 참사, 형제복지원 생존자부터 가장 최 근의 국보법 피해자까지. 평온하게 살기를 바라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는 무겁고 어려운 이야기다.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 세상이 변했다면 벌써 변했을 것”이라고 해정 씨는 말한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말하고 들을 기회와 장소, 무대를 많이 마련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덧붙인다. 비참한 세계를 마주하는 고통에 때로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 일을, 소위 말해 대단한 명예나 고액 연봉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계속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해정 씨는 얼마 전 TV 프로 그램에서 본 반지하 집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지하 방에서 살았거든요. 그러다 어느 순간 위로 올라오게 됐는데 그때부터 지하 방을 과거의 내 성장 배경으로만 여겼지, 여전히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거죠. 기록 활동은 이런 사회적 자극을 주는 것이기도 해요. 내가 안다고 여겼던 것을 끊임없이 반추하고 성찰할 수 있게요. 그래서 참 매력적이죠. 다른 사람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기도 하고요. 누군가의 경험을 통해 그 세계를 마주하면서 ‘나도 마주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 우리 함께 용기를 내서 마주하면 더 괜찮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요. 당신도 나도 더 좋은 세상에서, 행복하고 존엄한 존재로 살고 싶으니까. 그러기 위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자고요.”
탈시설 장애인 이야기를 담은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 밀양 송전탑 투쟁을 그린 <밀양을 살다>, 세월호 유 족 이야기를 담은 <금요일엔 돌아오렴> 등 그의 작업은 실제로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는 시설 거주 장애인의 탈시설 이후 문제를, <밀양을 살다>는 공동체와 그 속의 관계를 사유하게 했다. <밀양을 살다>는 ‘행동 독서회’ 등 책을 함께 읽는 것 자체가 저항이 되는 운동의 흐름을 만들기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북콘서트와 유족 간담회 등의 물꼬를 텄던 <금요일엔 돌아오렴>,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역시 세월호 유족과 시민이 만나는 가교가 됐다. 대형 참사를 뉴스로만 보던 한국 사회가 고통을 당한 사람의 목소리를 그대로 듣고, 이들의 얼굴을 응시하는 법을 배웠다는 점에서 이 책의 사회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희 활동을 채록이나 기록이라 하지 않고 ‘기록 활동’이라 말해요. 피해자의 곁에 선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실 구술을 듣고 기록하는 것에서 끝이 아니라 그걸 잘 들을 수 있는 사회적 자리, 장소, 기획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요. 기록 작가나 기록 노동자가 아닌, 활동가로 서로를 위치시키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항상 고민하고 있어요.”
‘생’이 아닌 ‘삶’이 있음을
‘어쩌면 우리가 피해자다움을 양산하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해왔던 작업 대부분 피해자 서사를 전면에 드러내는 것이다 보니 이런 경각심도 놓을 수 없다. 더불어 피해자의 ‘생’이 아닌 ‘삶’을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하는 것도.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그 사이의 ‘진동’이에요. 피해자도 아니고 투사도 아닌, 그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요. 사람에게는 100가지 마음이 있고 100가지 결이 있잖아요. 또 하나는, 피해자의 삶을 어떻게 그릴까 하는 것이죠.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목숨만 부지한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닌데, 우리는 곧잘 피해자에게 ‘생’이 있으면 됐다고 생각하죠. 살아남았으니 됐지 않냐, 이렇게요. 하지만 큰 고통 속에 있어도 웃을 수 있고, 수다도 떨고, 여행도 가며 일상을 살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 ‘삶’을 함께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사회가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문제지만, 피해자 스스로 그 틀에 맞추려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 사회가 어떤 형태의 고통에 더 잘 반응해 왔는지 함께 돌아봐야 할 대목이다.
남은 숙제들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은 해정 씨에게 여러 모로 남다르다. 1997년 숙명여대 총학생회 활동을 하다 국보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던 당시의 기억을 구술로 풀어냈기 때문. 그동안 기록자이기만 했던 그가 이번 작업을 통해 구술자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너무 싫었죠(웃음). 내가 그 많은 사람들에게 녹음기 들이밀고 이야기 듣겠다고 했을 때, 다들 얼마나 큰 용기를 냈던 건지 새삼 깨달았고요. 나는 어떤 기록자였을까 반추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기록자로서 나란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는 중요한 계기가 됐죠. 요즘은 사람들이 어떤 인터뷰어가 좋은 거냐고 물으면 ‘자기 치부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해요. 활자화된 내 이야기를 많은 사람이 보게 되는 것을 경험해보면 좋은 기록자가 될 수 있다고 얘기해주죠.”
지난 세월 마음 속 짐이던 국보법 이야기를 기록으로, 구술로 풀어 냈으니 이제 숙제 하나는 마친 셈이다. 그래도 아직 더 써야할 이야기가 남아있다. 국보법으로 돌아가신 분들에 관한 것이다. 이들의 말, 이들의 글, 이들의 생애를 조금이라도 더듬어 ‘당신의 삶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진전시켰는지’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게, 이번 전시 작업을 마친 그의 소회다.
스스로도 과연 이걸 할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무거운 주제도 있다. 아마도 하지 못할 것 같다며 웃는 그는, 그러면서도 일단 마음 속 숙제를 조심스레 꺼내보였다.
“우리 사회가 1990년대 초반까지 고문과 뗄 수 없이 왔거든요. 수많은 고문 피해자가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삶 속에 민주화가 온 건데, 그들의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다면 어딘가에 이들의 삶을 기록해두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겁이 나서 못할 거 같기도 해요. 증언하겠다는 사람을 찾기도 어렵고, 제가 그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을까 두렵기도 하고요. 인간이 인간에게 이렇게까지 끔찍해질 수 있구나 하는 걸 확인하는 과정이 될 테니까. 요즘 인권 운동의 화두는 ‘혐오’나 ‘차별’인데, 저는 사실 그보다 ‘고문’에 가까웠던 역사를 살았던 사람이라 이런 부채가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기록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제 속에 계속 얹혀있는 문제거든요.”
지난 과오를 함께 반추해야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그만의 숙제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어디 ‘고문’ 하나 뿐이겠는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우리 사회의 산적한 숙제들, 우리는 또 어떻게 마주해야할까. 오늘, 우리 스스로 던져야 할 물음이다.
글 사진 박누리
월간옥이네 2020년 8월호(VOL.38)
자치와 자급, 생태를 주요 가치로 삼아 지역과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 사람을 담는 월간 옥이네를 '정기 구독'으로 응원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