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인터뷰

번역이 열어주는 새로운 세계로

포도밭출판사 ‘나선형’ 시리즈 만드는 번역가 나현영 씨

by 월간옥이네

흔히 언어를 배우는 일을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에 비유하곤 한다. 지금 발 딛고 선 곳과는 또 다른 세상과의 연결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 언어가 셀 수 없이 많은 역사와 문화, 시간의 더께로 이루어져있음을 생각해본다면, ‘다른 세계’ 정도의 말은 어쩌면 너무 가벼운 표현일지 모른다.


그래서 한 언어를 또 다른 언어로 바꾸는 일, ‘번역’의 무게를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단순히 언어 구사력이 좋은 것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각기 다른 언어를 통해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번역가 나현영 씨를 만났다. 역사나 문화, 사회학, 문학은 물론 때로는 사진, 경제까지 폭넓은 분야의 책을 번역해온 그는 최근 포도밭출판사의 출판 브랜드 ‘나선형’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가 ‘나선형’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포도밭출판사의 ‘나선형’ 시리즈가 선보인 첫 책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는 미국 SF 작가 조애나 러스의 비평서로, 국내에는 아직 그의 책이 한 권도 번역돼있지 않던 터라 출간 전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텀블벅을 통해 출간 소식이 알려진 지난 4월에는 모금 마감을 보름 이상 남겨두고 목표금액을 달성하는 등 SF팬들의 열렬한 관심과 지지를 확인하기도.


언뜻 ‘SF가 우리 출판계 인기 분야’라는 착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결과이지만, 사실 여전히 한국 출판계에서 SF는 비주류에 속한다. 그런데 이 SF를, 그것도 소설이 아닌 비평서를 새로 시작하는 출판 브랜드의 첫 책으로 고른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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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장르를 좋아해서 계속 관련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실 소설 같은 건 저희처럼 작은 출판사에서 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홍보 등 감당하기 어려운 면이 많고, 독자들도 대형출판사에서 출간하는 소설을 더 선호하고요. 반면 인문학 분야는 저자나 출판사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주제에 따라 선택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에 대한 담론을 재미있게 느끼는 제 개인적인 취향도 일정 부분 반영됐죠.”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이름, 조애나 러스. 그렇기에 그의 책을 국내 첫 번역서로 내게 된다는 부담도 적지만은 않았다. 거기에 크라우드펀딩인 텀블벅으로 제작비를 조달하면서 약속된 일정을 지켜야한다는 압박도 크게 다가왔다. 출간예정일 한 달 여를 앞두고는 거의 매일 눈물 젖은 일기를 쓸 정도로 스트레스도 심했다. 그럼에도, ‘나선형’ 기획의 시작으로 이 책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기획하는 책이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국내 교양서 시장이 정말 많이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분야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의 영역’, 쉽게 말해 ‘덕질’할 수 있는 콘텐츠가 훨씬 더 생명력이 있다고도 생각했고요. SF는 그런 점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책을 만들자’는 제 기준에 맞았습니다.”


번역가로서 처음으로 기획까지 맡은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는, 그래서 그에게 지금까지의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기도 하다. 번역가로 일하던 초기, 문장 하나하나를 외울 정도로 집중했던 책 <낭만주의의 뿌리(2005년, 이제이북스)> 이상의 집중력과 애정을 쏟아 부었다고. 그만큼 시간에 쫓겼던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하지만 어찌 첫 술에 배부르랴. 대신 조애나 러스의 국내 첫 번역서를 통해 우리는 그처럼 말하고 쓰는 힘을 만날 수 있게 됐으니, 그의 아쉬움이 마냥 아쉬움으로만 남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사실 ‘비평’을 어렵게 생각하잖아요. 학문의 대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아요. 조애나 러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저항하는 사람들의 언어이고, 진실은 어렵지 않다’고 이야기 하거든요. 여성 비평이라는 게 그래서 참 재밌죠. 우리나라에도 SF 비평서가 있긴 하지만 SF 장르의 역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건 그게 아니라 한 여성의 관점에서 SF를 바라보고 이야기하거든요. 저는 그런 비평이 훨씬 더 객관적이고 독자들이 얻을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해요. 사실, ‘신’과 같은 관점에서 비평하는,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비평은 없어요. 대신 내가 어떤 위치에서 비평하는지를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 객관적인 비평이라고 생각하죠. 여기에, 조애나 러스의 글 자체가 정말 너무 웃기고 재밌어요.”


‘SF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야 말로 ‘비현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SF의 매력이 궁금해졌다. SF라고는 국내 애니메이션 <2020 우주의 원더키디>와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정도만 알 뿐인 ‘SF알못’의 편협한 생각은, 조애나 러스의 “SF가 현실을 바꿈으로써 현실을 분석하기 때문”이라는 말에 크게 흔들린다. 조애나 러스가 말하는 여성적 글쓰기, 여성적 관점의 비평이 SF라는 장르와 필연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최근 국내 출판계의 인기 SF 작가 정세랑, 김초엽과 그 독자층을 떠오르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현영 씨는, 그래서 ‘SF는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 사실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지적한다.


“조애나 러스가 활동했던 시기, 미국에서는 실제로 SF의 주요 독자층이 남성들이었죠. 남성적 코드로 가득 차 남성들이 쾌감을 느낄만한 SF 통속소설이 많았기 때문인데, 한국 상황은 좀 많이 달라요. 1990년대 국내에서 SF라는 장르를 아무도 다루지 않던 시기에 가장 먼저, 여성을 주체로 이야기를 풀어낸 강경옥, 김진 같은 여성 만화가들이 있었고요. 이뿐 아니라 1994년에 나온 듀나의 책이나, 2000년대 초반부터 활동한 김보영 작가 등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여성들이 SF 창작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미디어에서 막연히 이야기하는 ‘SF는 남성의 전유물’ 같은 말들을, 국내 SF 팬들은 굉장히 싫어해요. 적지만 오래 전부터 이 장르를 이야기해온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한국은 SF의 불모지’ 같은 말도 적절치 않죠.”


현영 씨는 이런 흐름이 1990년대 온라인을 통해 발달한 국내 하위문화의 발전 양상에서 왔다고 분석한다.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등 당시 PC통신은 (지금과는 달리) ‘성별을 알 수 없고, 평등’했기에 여성들이 자신의 상상력을 펼치기 좋은 공간이 됐다는 것. 개인적인 생각임을 전제한 현영 씨는 “여성임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 나를 여성으로 대하지 않는” 초기 온라인 세상이 미국 상황과는 또 다른 한국만의 SF 팬덤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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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

‘나선형’은 SF 외에도 퀴어, 페미니즘 등 총 세 가지 주제로 책을 기획하고 번역할 예정이다. 어떤 이에겐 충분히 익숙하고 재밌는 주제이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이야기들. ‘소외되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는 현영 씨의 말에서 그가 번역을 하는 이유, 그가 이런 주제에 집중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번역과 관련해 제가 좋아하는 책 <내 귀에 바벨 피시>에 보면, ‘번역이 발생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내가 다른 사람과 교류할 필요가 없을 때 번역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건데요. 너와 내가 완전히 똑같아지면 번역이 필요 없겠죠. 하지만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간극에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게 번역이니까요. 저는 이런 데서 재미를 느껴요. 한편으로는 굉장히 심화된 독서의 형태로, 작가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싶어서 하는 활동이 되기도 하고요.”


파파고나 구글 같은 AI 기반 번역 서비스가 사람의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지 않을까. 애초에 사람의 손을 거친 번역 결과물이 없다면 존재하지도, 이용할 수도 없을 서비스들이지만, 그에 앞서 ‘차이와 다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인간의 번역에 전제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출판 시장이 점점 어려워지는 데다, 교양서 등 외국 번역서 시장은 더 좁아지고 있어 직업으로서의 번역가 일에 걱정이 많은 것도 사실.


“아이슬란드 인구가 30만 명 정도 되는데, 여긴 출판 시장이 워낙 작고 영어를 공용어로 쓰다 보니 굳이 모국어로 번역을 하지 않아요. 학문도, 생각도 아이슬란드어가 아닌 영어로 하게 되는 상황인 거죠. 어쩌면 이렇게 한 언어가 소멸될 수도 있는 거고요. 한국은 그 정도 수준은 아니지만, 우리 역시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어야 하죠.”


‘번역’에 대한 오해도 번역가로서는 답답한 부분이 있다. 하나의 글이 쓰인 시대적·역사적·문화적 배경이 번역 과정 안에 녹아들어가고, 이 때문에 하나의 단어가 반드시 또 다른 하나의 단어와 대칭적으로 맞아 들어갈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대일 대응’을 요구하는 반응을 볼 때다.


“우리나라는 ‘직역주의’가 강해서, 영어로 세 단어이면 우리말로도 세 단어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기계적인 일대일 대응이 번역은 아니죠. 그런 인식에서 비롯된 오역 논란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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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기획까지 맡은 책을 무사히 출간한 후, 현영 씨는 또 새로운 책 번역 준비에 들어갔다. 1950년대 미국에서 활동한 제임스 볼드윈의 <미국의 아들의 기록(Notes of a Native Son)>이다.


“영국으로 치면 조지 오웰에 버금가는 작가예요. 미국 서점에 가면 매대에 이 사람 책이 쫙 깔려 있을 정도로 굉장히 많이 읽히는 작가이고요. 흑인이면서, 동성애자였어요.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살던 사람이죠.”


한 사람이 가진 다양한 정체성이 교차됐을 ‘나선형’의 다음 책을 기다리며, 현영 씨의 말을 한 번 더 되새겨본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죠. ‘내가 소수자가 아니라서 소수자가 등장하는 책은 왠지 잘 공감되지 않는다’고. 여기에 김보영 작가가 한 말이 기억에 남아요. ‘왕이 주인공인 이야기는 잘만 쓰고 읽으면서, 왜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는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느냐. 그것 자체가 이상하다’고요. 저 역시 여기에 동의해요. 사실 ‘정상성’은 환상에 불과하거든요. 인간이라면 자기 안의 비정상성, 소외를 느낀다고도 생각하고요. 자기 안의 소외를 더 많이 발견할수록 타인에 대해서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글 사진 박누리

월간옥이네 2020년 8월호(VOL.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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