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디자인> 2018년 3월호
스웨덴의 겨울은 길고 매섭다. 다만 겨울을 보내기 전, 2월의 첫째 주 스톡홀름은 북유럽 최대 가구 페어에 참여하기 위해 몰려드는 브랜드, 디자이너, 제조업자, 미디어로 후끈 달아오른다. 바로 이곳 스톡홀름 디자인 위크에서 2018년 주목할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트렌드가 읽힌다. 지난 2월 5일부터 11일까지 열린 스톡홀름 디자인 위크에서는 주요 리빙 브랜드가 신제품을 발표했고, 스웨덴 건축·디자인 뮤지엄 아르크데스ArkDes는 매해 선정하는 ‘젊은 스웨덴 디자이너’의 이름을 호명했다. 도심 곳곳의 갤러리와 박물관, 디자인 스튜디오, 코워킹 스페이스 등에서도 다양한 워크숍과 강연 등 200여 개의 부대 행사가 열렸다.
스톡홀름 디자인 위크는 북유럽판 밀라노 디자인 위크라 할 정도로 이 지역에서 막강한 규모와 영향력을 자랑하는 행사다. 모태가 된 행사는 1951년 조명과 가구 박람회로 선보였던 ‘스톡홀름 퍼니처& 라이트 페어Stockholm Furniture & Light Fair’다. 어느새 68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행사는 스톡홀름 시내에서 10km 거리에 있는 컨벤션홀 스톡홀름스메산Stockholmsmässan에서 열린다. 스베데세Swedese, 미타브Mitab, 예르스네스Gärsnäs, 오펙트Offecct, 포기아Fogia, 블로 스타숀Bla Station, 카스탈 Kasthall, 신나르프스 Kinnarps 등 대표적인 스웨덴 리빙 브랜드는 물론 카바드라트, 이스타블리시드 & 선스, 이딸라 등 유럽 각지에서 온 가구, 조명, 바닥재, 부품 전문 브랜드 700여 개가 총출동했고 4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갔다. 총 5일간 이어지는 페어 기간 중 첫 4일은 업계 관계자에게만 개방하고 일반인 관람객은 마지막 날인 토요일 하루만 방문할 수 있다.
스톡홀름 퍼니처 & 라이트 페어는 브랜드관 외에도 ‘올해의 게스트’ 특별 전시관, 신진 디자이너 전용관 ‘그린하우스’, 올해의 트렌드에 주목한 테마관, 팝업 레스토랑 등을 주목할 만 하다. 올해의 게스트로는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이자 건축가 파올라 나보네Paola Navone가 선정되었다. 모험적 인테리어로 유명한 파올라 나보네는 ‘에브리데이’를 뜻하는 태국어 ‘Tham ma da’를 주제로 일상 속 오브제에 특유의 이국적인 패턴과 텍스처, 패브릭, 컬러를 녹여냈다. 눈부신 네온 컬러의 패브릭에 실제 식물을 마치 하나의 패턴처럼 조화시키거나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바가지와 뜰채를 천장 조명 줄에 매달아 이국적인 팝아트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간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 로낭과 에르완 부륄레크, 나오토 후카사와, 콘스탄틴 그리치치, 폴 스미스, 이네케 한스Ineke Hans, 넨도, 일세 크로퍼트Ilse Crawford 등 매해를 대표한 ‘핫’한 디자이너들이 이 공간을 맡아왔다.
매년 만남의 장소로 응접실 역할을 했던 ‘디자인 바’는 올해부터 콘셉트를 바꿔 2000㎡ 규모의 팝업 레스토랑으로 변모했다. ‘라따뚜이 아레나’라고 이름 붙인 이곳에서 미디어 간담회부터 디자인 토크, 워크숍, 각종 시상식이 열렸다. 디자이너 루카 니셰토Luca Nichetto와 스톡홀름의 유명 식당인 레스토랑 아그리쿨투르 Restaurang Agrikultur의 셰프 니나 알린Nina Ahlin이 협업해 ‘음식과 디자인’을 주제로 하나의 거대한 설치 전시이자 공연장, 레스토랑을 꾸렸다.
한편 신진 디자이너 70 여 팀이 참여한 그린하우스는 2003년 페어부터 도입된 섹션이다. 말 그대로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친 디자이너들이 프로토타입을 선보이는 플랫폼으로, 매년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곳이다. 일본의 넨도, 스웨덴의 프론트Front, 덴마크/이탈리아의 감프라테시Gamfratesi, 캐나다의 MSDS 등도 이 무대를 거쳤다. 올해는 39명의 신진 디자인 스튜디오와 17개국에서 온 27개 디자인 학교가 참여했다. 올해 그린하우스에서 주목할 만한 전시로 여러 번 언급된 디자이너는 네덜란드의 안톤 카를손Anton Karlsson. <디진><도무스> <얏저Yatzer><스타일파크Stylepark> 등 유명 디자인 매거진 편집장들이 선정한 에디터스 어워드에서 올해의 ‘라이징 스타’ 상을 거머쥔 그는 머리와 다리를 놓는 홈을 판 욕조, 손 씻은 세면대의 물을 변기 물로 재사용할 수 있는 파이프 구조 등 좀처럼 신경 쓰지 않는 화장실 인테리어를 요소별로 새롭게 해석해 관심을 모았다.
올해 스톡홀름 디자인 위크를 둘러싼 화두는 실질적 차원에서의 ‘지속 가능성’이었다. 선언적 발언이나 마케팅적 구호를 넘어 범가구업계에 당장 적용할 만한 수준의 실천 방식이 거론됐다. 창문, 문, 바닥, 목조 주택, 가구, 주방, 계단 등과 관련된 약 700개 기업을 회원사로 두고 있는 스웨덴의 목재가공협회TMF(The Swedish Federation of Wood and Furniture Industry)는 ‘제품의 긴 수명, 무독성의 제조 공정, 부품과 재료 재사용’을 기준으로 13개의 모범 사례를 선정해 적극 프로모션했고, 대표적인 스웨덴 가구 브랜드 오펙트는 재활용한 알루미늄 Y자 프레임으로 만든 의자 피닉스Phoenix를 출시해 호응을 얻었다. 오피스 가구 브랜드 신나르프스는 아예 ‘더 나은 영향 지수The Better Effect Index’라는 자체 지표를 발표하며 앞으로 제품마다 지속 가능성 지수를 명시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한편 올해 트렌드관을 맡은 디자인 듀오 할레로에드Halleroed는 역설적으로 인테리어업계에서 급부상한 ‘가짜 재료’를 주제로 삼았다. 크래프트맨십에 대한 증폭된 관심으로 나무와 메탈, 글라스, 가죽에 대한 수요가 그 어느 때보다 높지만 이러한 ‘리얼 머티리얼’의 공급은 한정적인 만큼 이를 과도하게 생산해내는 것이 오히려 환경 파괴적이고 비윤리적이라는 목소리에 주목한 것(페이크 퍼의 유행을 생각해보라). 전시는 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거대한 ‘가짜’ 나무 기둥을 줄 지어 세워놓거나 사진으로 찍은 콘크리트나 동물의 털을 러그에 프린트해 바닥에 깔아놓는 식이었다. 아크네 스튜디오의 매장 인테리어 디자인을 도맡아온 것으로 유명한 할레로에드는 “인간의 손을 거친 인공 재료로 만든 결과물이 기능적이고 조형적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게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되묻는다.
스톡홀름 디자인 위크는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데에도 적극적이다. 협회와 정부, 기관 차원에서 가장 힘을 싣는 행사가 바로 ‘영 스웨덴 디자인Ung Svensk Form’이라는 어워드다. 지난해 말 서울 DDP에서도 한국 신진 디자이너들과 교류전 형식으로 <영 스웨덴 디자인 2017>이 열리기도 했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하는 영 스웨덴 디자인은 스웨덴 디자인 협회, 이케아, 아르크데스, 말뫼Malmö시가 후원한다. 수상자에게는 장학금과 전시 지원, 이케아에서의 5개월 근무 기회를 제공한다. 2018년의 주인공 29명은 디자인 위크 기간에 선보이는 전시를 시작으로 이후 일본을 거쳐 글로벌 순회 전시에 참여하게 된다. 특히 올해 영 스웨덴 디자인에서 가장 주목받은 작품 중 하나는 콘스트팍에서 산업 디자인을 공부한 한국인 디자이너 조경진의 스윙 잼Swing Jam이다. 물레와 코일링 기법으로 만든 여러 개의 항아리 사이를 2개의 펜듈럼이 교차하며 불규칙적인 소리 패턴을 만드는 인스톨레이션으로, 한정된 공간 그 이상을 채우는 커다란 디자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패션 디자이너 마틸라 노르베리Matila Norberg는 섬유에 독특한 열 가공 기술을 더해 납작하면서도 3차원적인 구조를 표현해 몸에 입는 조각품에 가까운 패션을 선보였고, 가구 디자이너 헴모 홍코넨 Hemmo Honkonen은 의자와 서랍장에 각각 아코디언과 하프를 장착해 앉거나 문을 열면 자연스레 악기 연주 소리가 들리는 인터랙션을 연출해 눈길을 끌었다.
스웨덴 통계청에 따르면 2017년 스웨덴 가구 산업의 전체 규모는 230억 크로나(약 3조 838억 원) 상당이다. 스웨덴은 오랜 역사의 전통적인 가구 회사가 많은 만큼 스톡홀름에서 멀지 않은 외곽에도 제조 공장이 많고,
중국이 부상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가까운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에서 제조업을 충당한다. 비용이나 거리,
소통 면에서 분명히 합리적이고 편리한 부분이 있다. 여기에 스웨덴은 정부와 기관, 기업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한편에서는 오늘날 스웨덴의 디자인의 성공이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라는 세기의 브랜딩에 기인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문화평론가 사라 크리스토페르손Sara Kristoffersson은 스웨덴이 스칸디나비아를 대변하는 민주적인 디자인의 나라로 인식된 것은 철저한 ‘내러티브의 성공’이라고 말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Design by Ikea>에서 꼬집었듯,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1954부터 1957년까지 미국과 캐나다를 돌며 개최한 전시 <스칸디나비아에서의 디자인Design in Scandinavia>에서였다. 이는 지리적으로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속하지 않지만 당시 북미 시장 진출이 간절했던 전쟁 직후 핀란드도 합세한, 다분히 마케팅 목적을 띤 제목이었다. 이후 1968년 파리 장식미술박물관에서도 <스칸디나비아 양식Forme Scandinaves>이라는 전시회가 열렸고, 역시 북유럽 국가에서 온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었으나 큐레이터는 인지도 낮은 ‘북유럽’이라는 단어 대신 ‘스칸디나비아’라는 단어를 택했다는 것. 하지만 그 기저에는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하고, 누구나 아름다운 환경에서 살 권리가 있으며, 모두에게 그런 환경을 제공하려면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회적 이해와 합의가 있었던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스웨덴을 가난한 국가에서 복지국가로 바꾼, 1920~1970년대에 정권을 잡은 사회민주당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 움직임의 주체가 표면상으로는 ‘정당’이었지만 결국 이를 지지한 국민 개개인이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은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다. 좋은 브랜드란 형체조차 필요 없이 상징성으로 군림하는 법이다. 스톡홀름 기반의 8년 차 가구 스튜디오 페리 & 블란셰Färg & Blanche의 프레데리크 페리Fredrik Färg는 이에 관해 단호하다. “스웨덴 디자이너들은 이제껏,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를 따라다닐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을 되풀이하려는 게 아니에요. 헤리티지는 그 자체로 소중히 여기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저마다의 디자인을 하는 거죠.” 타고난, 다분히 호의적인 헤리티지에 안주하지 않는 스웨덴 디자이너들로 인해 지금 이 순간도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은 끊임없이 내실을 다져가고 있다.
글: 김은아 기자 ⓒ월간 <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