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는 반전의 이미지는 순해 보이던 사람이 극악무도한 범죄의 범인이었다거나, 아무도 몰랐던 비극적인 출생의 비밀 같은 아침 드라마처럼 극적이고 깜짝 놀랄만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빈 수레는 요란한 법이다. 대놓고 소란스러운 반전보다는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생기는 물결처럼, 고요하지만 천천히 영향력을 넓혀가는 반전이야말로 그 파급력이 크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그 반전의 주인공은 바로 역사적인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다.
많은 이들을 분노케 했던 2014 소치 동계 올림픽의 피겨를 기억하는가? 매번 아름다운 작품으로 큰 울림을 주었던 김연아의 은퇴 무대였기에,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감정이 요동쳤던 올림픽이었던 것 같다. 김연아는 쇼트 프로그램에선 ‘어릿광대를 보내주오(Send in the Clowns)’를, 프리 프로그램에선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를 완벽하게 선보였다. 아디오스 노니노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우승을 직감한 관중들의 박수가 울려 퍼졌고, 전 세계의 해설진들은 김연아의 연기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런 반응들이 무색하게도 세상은 공정하지 못했다. 투명한 빙판 위에서 빚어진 탁하게 물든 사람들의 만행은 스포츠 정신 또한 어둡게 물들였다.
(*쇼트 프로그램과 프리 프로그램: 프로그램이란 피겨 스케이팅의 구성을 말한다. 쇼트 프로그램은 2분 50초 내로 제한되는 짧은 프로그램으로 프리 프로그램보다 선행된다. 프리 프로그램은 남자는 5분, 여자는 4분을 제한으로 둔다.)
그러나 이후 마지막 갈라쇼에서 김연아가 펼친 무대는 바로 존 레넌(John Lennon)의 ‘Imagine’이었다. Imagine은 비틀스의 멤버였던 존 레넌이 1971년 베트남 전쟁 당시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아 발표한 곡이다. 전 세계인이 모여 펼치는 올림픽의 페어플레이 정신이 짓밟혔던 빙판 위에서, 그녀는 ‘평화’를 노래하는 imagine에 맞춰 아름다운 연기를 펼쳤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 얼마나 멋진 반전이란 말인가? 발랄한 무대들로 고조되었던 관객석은 김연아의 무대가 시작하자 일제히 엄숙해졌다.. 그녀는 큰 소리 내지 않고, 어떤 권력도 휘두르지 않고, 그저 잔잔히 그리고 고요히 평화의 무대를 전달했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 공기 중엔 박수갈채만이 남아 있었다.
Imagine을 작사/작곡한 존 레넌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사회운동가이다. 그는 아나키스트이자 반전주의자였는데, 그의 사상이 Imagine의 가사에 여실히 드러난다. 전반적인 노래의 분위기 또한 평화롭고 아름답다. 다 같이 노래의 가사를 감상해보자.
Imagine there’s no heaven,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It’s easy if you try, (해보면 쉬울 거예요)
No hell below us, (우리 아래 지옥은 없고)
Above us only sky, (위엔 오직 하늘뿐인)
Imagine all the people, (상상해봐요, 모든 이들이 오늘을 위해 살아가는 걸)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국가도 없다고 상상해봐요)
It isn’t hart to do,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Nothing to kill or die for, (누굴 죽이거나 죽지도 않고
And no religion too, 또 종교도 없는 곳을)
Imagine all the people (상상해봐요, 모든 이들이
Living life in peace… (you)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You may say I’m a dreamer, (당신은 나를 몽상가라 말할지도 몰라요)
But I’m not the only one, (하지만 나만의 꿈은 아니에요)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언젠가 우리와 함께하길 바라요)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그럼 세상은 하나가 될 거예요)
Imagine no possessions (가진 게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I wonder if you can,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No need for greed or hunger, (욕심을 부리거나 굶주릴 필요도 없고)
A brotherhood of man, (오직 인류애만이 남을 거예요)
Imagine all the people (상상해봐요, 모든 이들이
Sharing all the world… (you) 온 세상을 함께 나누는 걸)
You may say I’m a dreamer (당신은 나를 몽상가라 말할지도 몰라요)
But I’m not the only one, (하지만 나만의 꿈은 아니에요)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언젠가 우리와 함께하길 바라요)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그럼 세상은 하나가 될 거예요)
가사를 음미해 보면, 그가 탐욕과 싸움이 없는 평화를 꿈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사처럼 여러분은 존 레넌이 바라는 평화의 모습이 너무 이상주의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몽상가의 노래에 전 세계인이 큰 울림을 받은 것은 왜 인가. 김연아의 Imagine에 많은 이들이 경의의 박수를 보낸 것은 왜 인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도 마음 한편에는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김연아의 Imagine을 처음 봤을 때의 전율을 잊을 수가 없다. 한 마리의 나비가 춤추듯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가 아름다웠다. 한 번의 점프 실수마저도 동작의 일부인 것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모든 동작은 이미지적이면서 유려했다. 김연아는 이전에도 분명 ‘레미제라블’, ‘죽음의 무도’, ‘거슈윈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 등을 통해 세계로부터 기술과 예술성 모두를 인정받은 스케이터였지만, 그 능력이 가장 농익어 터져 나온 것은 마지막 무대인 소치 올림픽이다. 그녀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는 바로 전달력이다. 그저 기술만이 난무하거나 어렵기만 한 무대가 아닌 프로그램의 주제를 관중들에게 전달하는 호소력이 있다. 이는 그녀의 안무 표현과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는데, Imagine에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김연아는 평화(peace)라는 가사가 나올 때 손으로 브이 자를 만드는데, 이는 그냥 흔히 사진 찍을 때 취하는 포즈가 아닌 해외에서 평화를 의미하는 손동작이다. 그녀는 거의 모든 안무를 노래의 박자와 선율에 맞춰서 적절히 표현해 내는 것에 능숙하기 때문에, 이런 손동작의 포인트 또한 음악의 구성에 맞게 잘 살려냈다.
위의 평화 동작처럼 노래 가사 중 ‘하나(one)’가 나올 때 그녀는 작은 포인트 안무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는 가사를 직관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에게 가사의 의미 또한 잘 전달하기 위함인데, 자칫하면 촌스럽거나 없어 보일 수 있는 동작을 전체적인 분위기와 잘 어우러지게 표현하고 있다.
음악의 가장 고조되는 부분에 빙판 위에서 달려가며 파워풀한 안무를 하고 있다. 김연아는 평소에도 빙판을 넓게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부분 역시 빙판을 가로질러 달리면서 관중에게 시원함을 줌과 동시에 프로그램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몽상가(dreamer)라는 가사에 맞춰 점프를 하는 모습이 마치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날갯짓과 같은 인상을 준다. 피겨에서 점프는 보통 기술점수를 높이기 위해 음악에 어울리지 않아도 최대한 욱여넣기도 하지만, 김연아는 항상 음악에 짜 맞춘 듯한 점프로 전체적인 프로그램의 조화를 유지한다.
김연아는 최고 퀄리티의 스핀으로도 유명하다. 김연아의 이름을 딴 ‘유나 카멜 스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녀의 스핀은 우아하고 섬세하다. 스핀의 마지막에서 그녀의 손동작은 마치 한 마리의 백조가 날개를 펼치는 듯하다.
프로그램의 마지막은 기도하는 안무로 끝이 난다. 언젠가는 이 세상이 imagine의 가사처럼 평화로운 날이 오길, 그리고 그 평화를 이끄는 데에 동참하길 바라는 그녀의 연기가 여운을 남겨준다.
되도록이면 여러분들이 영상 풀 버전을 감상했으면 좋겠다. 김연아의 연기는 위와 같은 클립으로만 담기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아름답기 때문에. 유튜브의 Imagine 영상 댓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이걸 보면 세계 평화라도 올 것만 같다.” 약 2만 5천 개의 좋아요가 달린 댓글이었다. 물론 좋아요 수로 무언가를 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지만, 그만큼 많은 이들이 그녀의 연기에 감화되었다는 지표 정도는 되지 않나. 항상 극적이고 거창한 것만이 반전은 아님을 그녀는 몸소 보여주었다. 오히려 고요함 속에서 피어나는 반전이 더 큰 파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말이다.
그녀는 여전히 세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조용히 또 거대하게 노력하고 있다. 김연아는 유니세프의 국제 친선대사이며, 나라에 관계없이 많은 구호활동을 펼쳐왔다. 그녀가 역대 기부한 금액은 무려 총 50억 원에 달한다. 그녀가 빙판 위에서 일으킨 작은 날갯짓이 부디 언젠가는 큰 돌풍이 되어 나비효과를 일으키길 작게나마 바라본다.
글 | 김민경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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