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간 도슨트 Jul 17. 2021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군무 무용수'의 이야기




(왼) 안무가 제롬 벨 ©The Guardian / (오) 오페라 가르니에 ©Opéra national de Paris



  2004년, 프랑스 유명 안무가인 ‘제롬 벨’의 신작 공연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화려함으로 명성이 높은 세계 최대 규모의 극장, ‘오페라 가르니에’의 객석이 가득 찼다. 이내 불이 꺼지고, 관객들의 기대감은 높아진다.


 

베로니크 두아노. ©SensCritique



  그때 반전이 일어난다. 거대한 파리 오페라 극장의 무대에 등장한 풍경은 아름다운 무대 미술도, 대규모 오케스트라단도 아니었다. 관객들 앞에 나타난 사람은 한 무명 무용수였다. 그녀의 이름은 베로니크 두아노,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오랜 시간 일한 군무 무용수이다.

  두아노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연습복 차림, 그리고 물통을 든 모습으로 무대의 가운데에 선다. 공연 <베로니크 두아노>의 시작이다. 그녀가 입을 연다.


“제 이름은 베로니크 두아노입니다. 두 아이의 엄마이고, 42살이죠.
저는 8일 후 정년퇴직을 합니다. 오늘이 제 마지막 공연 날입니다.”

 




한 군무 무용수의 이야기


©Kaaitheater



  적막한 무대 위에서 ‘이제껏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군무 무용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아노는 자신의 재능이 충분치 않고, 자신의 몸이 너무나도 연약하다고 생각했다고, 그래서 스타가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전설적인 무용수 ‘루돌프 누레예프’에게 조언을 들었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좋아하던 춤을 다시 춰본다.



©Artsy



  두아노는 입으로 음악을 흥얼거리며 ‘라 바야데르’의 유령 역할을 다시 재연한다. 힘겨운 숨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지고,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흐른다. 초라한 무대가 끝나자 사람들은 살짝 무안한 듯 박수를 보낸다. 두아노는 숨이 차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물을 급하게 들이킨다.

  관객들은 깨닫는다. 무대 위 무용수들은 땀방울조차 맺히지 않을 듯 완전무결하지만, 그들도 사실 나이 들고, 지치고, 헐떡거리는 인간들이었다는 점을 말이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화려한 의상을 벗겨낸 무대는 ‘치열한 생존의 장’이었다.



©Wordpress.com




  두아노는 또한 ‘백조의 호수’ 작품 군무를 재연한다. 이번에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채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녀는 오데트가 아니다. 그녀가 맡아온 역할은 오데트와 왕자의 춤을 돋보이게 해주는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애달픈 음악이 흘러나오는 무대에서, 두아노의 서 있는 뒷모습만을 보게 된다.
 






‘일개’의 세계



©DAFilms.com



  이름조차 불리지 않았던 ‘일개’ 군무 무용수인 두아노는 우리와 닮았다. 도서관에서 홀로 공부하는 ‘일개’ 대학생, 직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일개’ 회사원…사실 우리의 모든 삶은 거대한 무대를 가로지르는 한 명의 무용수와 같다.

  그러나 ‘베로니크 두아노’는 그저 공감에서 끝나지 않기에 위대하다. 두아노는 무용수로서의 사랑했다고 말한다. 언제나 관객들의 박수를 사랑했다고 말하며, 마지막까지 최선의 춤을 보여주고 떠난다. 땀 흘리는 육체와 힘겨운 숨소리는 더 이상 ‘무대에서 감추어야 할 부끄러운 실수’가 아니다. 언제나 진심을 다 해 춤춰왔다는 ‘영광스러운 삶의 증표’이다.



©Anna van Kooij






찬란함은 소수의 것.


  팝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가 그랬던가, ‘나의 비하인드 씬을 남의 하이라이트 씬과 비교하지 말라’고.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전성기를 가지고 있다는 따뜻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어떤 사람의 전성기는 다른 사람의 것보다 훨씬 덜 빛나기도 한다. 주인공이 있다면 엑스트라도 있는 법, 세상은 소수의 찬란한 삶 만을 조명하고, 칭찬하고, 또 존경한다. 이 씁쓸한 사실은 너무나 엄격하고 단호해서, ‘각자의 인생에서는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번듯한 말로도 포장할 수 없다.

  일개 군무 무용수였던 베로니크 두아노는 평생을 춤의 뒷 배경으로 살았다. 나이가 들어 무대를 떠나야 할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빛내기 위해 배경을 자처하지 않았다.

  두아노는 아주 담담한 말투로 자신의 경험을 풀어낸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속에 얼마나 두꺼운 감정의 퇴적물이 쌓였을지는 그 누구도 감히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자신의 이름을 딴 무용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고 해서, 그녀가 행복했으리라 확신한다면 그건 끔찍한 오만이다.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춤을 감상하고, 무대를 떠나는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 그뿐이다.


무대의 막이 내렸고, 한 명의 무용수가 무대를 떠났다.




젊은 시절의 베로니크 두아노. ©Jacques Moatti







글 | 강운지

편집 | 김희은





아래 월간 도슨트 인스타 계정을 통해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https://instagram.com/monthly_docent?igshid=1c09qpgfuv  

작가의 이전글 반전(反戰)을 위한 반전(反轉) | 화가 케테 콜비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