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시티팝이라는 장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이제 위의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는 앨범 9장을 들어보면서 시티팝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수록된 모든 곡들이 다 좋지만, 편의상 앨범마다 추천곡 네 곡씩을 골라보았습니다.
시티팝이라는 장르를 대표하는 앨범
시티팝 명반 추천에서, 더 나아가 일본 대중음악 명반 추천에서 거의 항상 상위권으로 꼽히는 오오타키 에이치의 ‘A Long Vacation’이 첫 번째 추천 음반입니다. 시티팝이라는 음악의 이미지를 확립한 동시에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앨범입니다. 시티팝의 유행의 도화선 같은 앨범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오타키 에이이치는 핫피엔도라는 전설적인 일본 밴드의 멤버이기도 한데요, 밴드 해체 후 ‘나이아가라’라는 레이블을 만들고 많은 아티스트들을 발굴합니다.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슈가 베이브의 멤버인 야마시타 타츠로와 오오누키 타에코가 있습니다. 여러모로 시티팝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의 대표작입니다.
사운드적인 측면에서는 AOR, 소프트록, 트로피컬 사운드 등이 어우러져 청량한 여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월 오브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입체적인 음향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추천 트랙 1, 3, 8, 9
2) 호소노 하루오미(細野晴臣)/스즈키 시게루(鈴木茂)/야마시타 타츠로(山下達郎) – Pacific (1978)
여름을 가득 담은, 듣고만 있어도 휴양지가 생각나는 앨범
일본 대중음악의 거목인 호소노 하루오미가 야마시타 타츠로 및 스즈키 시게루와 함께 발표한 ‘Pacific’이 두 번째 추천 음반입니다. 사실 ‘팝’이라고 분류하기는 조금 애매한 앨범이기도 합니다. 보컬이 들어간 곡이 한 곡이고 나머지는 연주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선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운드’적인 측면에서 시티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앨범이기 때문입니다. 시티팝 특유의 ‘여름, 휴양지, 해변’에 잘 어울리는, 듣고만 있어도 마치 남국의 휴양지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앨범입니다.
*추천 트랙 1, 2, 3, 4
대중성과 음악성 모두를 잡은, 명실상부한 시티팝 최고의 앨범
시티팝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아티스트인 야마시타 타츠로가 1982년 발표한 ‘For You’가 세 번째 추천 음반입니다. 오누키 타에코와 함께 발표한 데뷔작인 슈가 베이브, 또 다른 솔로 명반으로 꼽히는 ‘Circus Town’, ‘Spacy’, ‘Ride On Time’, 연륜이 느껴지는 ‘Ray Of Hope’ 등등, 좋은 앨범을 정말 많이 발표한 야마시타 타츠로지만 그래도 역시 한 장을 꼽으면 단연 이 앨범이 아닐까 합니다.
브라이언 윌슨의 영향이 느껴지는 켜켜이 쌓아 올린 사운드와 코러스, 훵키함과 그루브함이 넘치는 기타와 베이스, 거기에 서정성 넘치는 발라드까지. 시티팝의 모든 매력적인 요소들이 듬뿍 담긴 좋은 앨범입니다.
*추천 트랙 1, 6, 7, 12
차분한 여름의 새벽녘에 어울리는 단아함이 매력인 앨범
다양한 장르에의 도전을 통해 일본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힌 싱어송라이터 오오누키 타에코가 1978년에 발표한 Mignonne이 네 번째 추천앨범입니다. 1973년에 야마시타 타츠로와 함께 데뷔한 이후, 보사노바, 재즈, 뉴웨이브 등을 접목한 다양한 시도를 하며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입니다.
‘Mignonne’ 의 사운드는, 다른 앨범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미니멀하고 소박합니다. 풍성하진 않지만 그만큼 여백의 미와 울림이 매력적입니다. 차분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보컬이 어우러져, 뜨겁고 활기 넘치는 여름의 낮보다는, 새벽과 심야에 어울리는 느낌이 듭니다. 앨범의 대표곡의 제목이 4:00 A.M. 인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추천 트랙 3, 4, 7, 8
Plastic Love로 시티팝 붐을 불러온, 도회적인 여름밤의 정취가 느껴지는 앨범
그 유명한 Plastic Love가 수록된, 타케우치 마리야의 1984년 앨범인 Variety가 다섯 번째 추천 앨범입니다. 1981년 음악활동을 중단한 후 발표한 복귀작이자, 전곡의 작사/작곡을 타케우치 마리야 본인이 함으로서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면모를 드러낸 앨범이기도 합니다. 또 배우자인 야마시타 타츠로가 코러스와 편곡, 프로듀싱을 맡았기에 그의 스타일이 앨범 곳곳에서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티팝 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장르의 곡들로 가득한, 타이틀처럼 버라이어티함이 매력인 앨범입니다. 타케우치 마리야 특유의 음색과 곡들의 분위기가 어우러진, 여름밤의 네온사인이 가득한 도시가 떠오르는 음악들이 가득합니다.
*추천 트랙 1, 2, 6, 10
쿨한 키보드 소리가 매력인, 원맨밴드로 만들어 낸 신스팝 앨범
저명한 키보드 세션맨이자, 미국에 진출해서 활동하기도 한 싱어송라이터 사토 히로시의 1982년 앨범인 ‘Awakening’이 여섯 번째 추천 앨범입니다. 호소노 하루오미의 YMO 멤버로의 제의도 거부하면서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으로 진출한 그는, 현지의 음악가들과의 교류 후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는데요, 이 앨범은 그가 귀국 후 발표한 첫 번째 앨범이기도 합니다. 미국에서 만난 Wendy Matthews 라는 아티스트가 몇몇 곡의 보컬로 참여했습니다.
야마시타 타츠로 등이 한두 곡 정도 기타 세션으로 참여한 것을 제외하면 모든 곡의 창작, 연주, 녹음을 혼자서 진행한 원 맨 밴드 앨범이라는 점도 특기할 만한 부분입니다. 당시 최신의 드럼머신이었던 Linn 사의 LH-1으로 만들어낸 비트들과, 쿨한 톤의 Fender 사의 Rhodes 키보드 소리가 인상적입니다. 또한 전곡의 가사가 영어인데요, 비틀스의 히트곡인 From me to you를 본인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하기도 하였습니다.
*추천 트랙 2, 3, 10, 11
여름 느낌 200%, 정열적인 여름의 기운이 가득 담긴 앨범
1980년대에 큰 사랑을 받은 아티스트인 안리가 1983년에 발표한 앨범인 TImely가 7번째 추천 앨범입니다. 유명 프로듀서인 카도마츠 토시키와 함께 작업한 앨범으로, 같은 해 크게 히트한 싱글인 ‘CAT'S EYE’와 ‘悲しみがとまらない(슬픔이 멈추지 않아) / CAN'T STOP THE LONELINESS’ 가 수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앨범 또한 흥행에 성공하며 오리콘 앨범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화려한 브라스와 서정성을 더하는 피아노, 훵키한 기타와 베이스 등 시티팝의 매력적인 요소들이 모두 녹아든 앨범입니다. 듣고 있으면 뜨거우면서 시원한 여름의 해변이 생각나는 음악들로 가득합니다. 하와이에서 촬영한 자켓 사진이 이러한 느낌을 더해줍니다.
*추천 트랙 1, 2, 6, 11
보다 소프트하고, 보다 팝스러운, 이지리스닝 시티팝의 대표작
싱어송라이터이자 히트 작곡가인 하마다 킹고가 1982년 발표한 앨범인 Midnight Crusin’‘ 이 여덟 번째 추천 앨범입니다. 다른 시티팝 앨범들과 비교했을 때, 보다 부드럽고, 보다 팝스러운 성향이 짙습니다. 목관악기와 스트링 등을 세련되게 활용한 편곡이 이러한 느낌을 주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피아노 및 키보드에 기반한 발라드곡들과 낮고 부드러운 보컬의 조화도 그렇고요. 물론 시티팝으로 분류되는 앨범답게 훵키하고 그루비한 트랙들도 매력적입니다. 듣기 편한 이지리스닝의 분위기를 갖고 있는 앨범이라서, 타이틀처럼 심야에 즐기기에 적합한 음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추천 트랙 2, 3, 4, 9
따스한 톤의 기타팝이 주가 되는, 시티팝의 숨은 보석과도 같은 앨범
베테랑 기타리스트이자 코러스 세션인 마츠시타 마코토가 1982년 발표한 ‘First Light’ 가 마지막 추천 앨범입니다. 야마시타 타츠로가 세운 레이블인 ‘MOON RECORDS’에서 처음 발매한 앨범이기도 합니다.
훵키하고 그루브한 기타와 베이스가 음악의 기반이 된다는 점, 코러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야마시타 타츠로의 음악들과 유사점을 갖기도 하지만, 마츠시타 마코토의 음악은 쿨하고 차분한 밤거리가 어울린다는 느낌을 줍니다. 따스하면서 보다 리버브가 들어간 기타의 톤이나, 브라스 대신 키보드 및 신스를 많이 활용하는 등의 구성에서의 차이가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독특한 매력을 가진 이 앨범은 많은 시티팝 애호가들 사이에서 숨은 걸작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추천 트랙 2, 4, 5, 8
시티팝이 다시금 사랑을 받게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에는 소위 말하는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있습니다. 2017년경부터 많은 유튜브 유저들의 추천 영상에, 검색해 본 적도 없는 타케우치 마리야의 ‘Plastic Love’가 노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밈’으로서 화제를 모았던 이 곡은, ~에 이르러서는 조회수가 이 될 정도로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곡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은 이내 야마시타 타츠로 등의 다른 시티팝 곡들도 찾아보게 되었고, 이런 식으로 인터넷 문화 상에서 시티팝은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글로벌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인 스포티파이에서는 한때 마츠바라 미키의 ‘Stay with me’가 글로벌 바이럴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티팝의 재유행에는, 201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 지금까지의 대중음악계의 화두인 레트로/복고 열풍도 큰 관련이 있습니다. 디스코, AOR 등 1970~80년대에 유행한 장르들을 재해석한 곡들이 유행하는 오늘날의 트렌드와, 장르적 유사성을 공유하는 시티팝의 인터넷상에서의 급부상이 맞물려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도 2010년대 중반 이후로 여러 아티스트들이 시티팝에 영향을 받은 음악들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ADOY 등의 아티스트들은 시티팝/신스팝에 기반한 곡들을 발표해 인디신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 유키카, 김아름 등의 아티스트들도 ESTi, 뮤지, 스페이스카우보이 등의 작곡가/프로듀서와의 협업을 통해 좋은 곡들을 계속 발표하고 있습니다. 베테랑 싱어송라이터 윤종신도 ‘월간 윤종신’을 통해 최근 몇 년 간 시티팝 곡들을 꾸준히 발매하고 있는데요, 특히 2020년 여름에는 하마다 킹고와 같이 ‘기분’과 ‘생각’을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a. 유키카 - NEON (2019)
b. 김아름, 뮤지 – Aqua (2020)
c. 윤종신, 하마다 킹고 – 기분 (2020)
d. Adoy – Grace (2017)
거리두기로 인해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계실 여러분,
이제 제법 선선해진 늦여름 바람이 살 불어오는 저녁 시간에
방 창문을 열고 시티팝 한 곡을 재생해 보세요.
여러분의 일상에 작은 쉼표가 되어줄 거예요.
글 | 최진호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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