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초기 표현주의 대표 화가 파울라 베커(1876-1907).
그녀는 서양 미술사 최초로 누드 자화상을 그린 여성 화가이다.
여성 혼자 힘으로는 경제 활동을 하기도 화가로 인정받기도 어려웠던 시대, 1800년대 후반.
파울라는 예술계의 냉담한 평가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향해 끝없이 도전한다.
2017년 개봉한 영화 파울라는 화가 파울라의 삶을 조명하고, 그녀의 뜨거운 예술혼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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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ds up: 영화 파울라에 대한 스포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낙서가 아니야. 감정을 표현한 그녀의 그림 : 표현주의
영화는 주인공 파울라가 당대 유명 화가들이 모여 살던 독일 예술가 공동체 보릅스베데에 들어가며 시작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밀하게 묘사하던 기존 화풍과 달리, 파울라는 자신이 느끼는 것에 집중하여 주관적인 감정을 그려낸다. 과장된 색채와 왜곡된 형태를 사용해 사물을 표현한다.
1910년을 전후하여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각지에 등장한 표현주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화가의 감정을 작품으로 표현해내는 화풍을 일컫는다. 현대에 와서 파울라는 초기 표현주의를 선두한 실력 있는 화가로 평가 받지만,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녀의 작품은 어린아이가 그린 낙서와 다름없이 취급되며 조롱당한다.
파울라는 주변의 괄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예술관을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여성의 몸에 호기심을 가지고 마을 여인을 모델로 삼아 그들의 모습을 재해석해 화폭에 담아냈다. 그녀는 공동체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그림을 인정해준 남자 오토 모더존과 결혼해 작품 활동을 이어가지만, 결국 5년 만에 남편을 마을에 두고 홀로 떠나게 된다.
사실, 파울라의 결혼 생활은 행복한 편이었다. 남편 오토존은 그녀를 존중하고 사랑했다. 그러나 파울라는 남편의 사랑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꼈다. 반쪽짜리 행복. 화가로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진정한 행복을 이룰 수 없었다. 오토존이 점점 더 높은 가격에 그림을 팔며 커리어를 쌓는 동안 파울라는 수백 번 좌절하고 넘어지며 자신이 화가로 존재할 공간을 찾았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혼자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세기말 해방된 여성화가? 여성이라는 성별에 갇힌 파올라의 예술혼
마을을 떠난 파울라는 언제나 그녀를 지지해주는 두 친구, 클라라와 릴케가 있는 파리로 떠난다. 클라라 베스트호프는 보릅스베데에서 파울라와 함께 미술을 공부하던 친구로,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강한 여성 화가였다. 이런 공통점을 바탕으로 그들은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다. 클라라의 남편이자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녀들의 가장 큰 지지자였다. 릴케는 파울라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작은 공동체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에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추운 겨울, 그녀는 무거운 가방과 이젤을 메고 또 다른 짐을 질질 끌며 눈길을 헤쳐나간다. 그녀가 가는대로 눈 위에 새겨지는 발자국과 자취는 당시 드문 여성 화가로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고난을 뚫고 나아가는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파리에서의 삶은 경제적 궁핍과의 싸움이다. 여성의 경제 활동이 불가하던 시대, 남편의 도움 없이는 예술 학교에 가는 것도,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웠다. 다행히 남편 모더존이 그녀의 예술 활동을 한동안 지원해 주었기에 그녀는 당대 유명 화가 폴 세잔과 로댕의 작품을 감상하고, 미술을 배울 수 있었다.
"여성은 창의적인 것을 생산해낼 수 없어. 아이 말고는”
한편, 파울라가 마을을 떠나자 그녀의 스승 마켄젠은 모더존을 비난하며 남편의 권리로 그녀를 다시 데려오거나 정신병원에 가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켄젠은 단 한 번도 그녀의 그림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파울라의 열정을 두고 “결혼 전에 한 번 놀아보는 것”이라 취급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당시 사회가 여성 화가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파울라를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지적하는 마켄젠의 모습에서는 경멸 그 이상의 것, 즉 질투가 느껴진다. 자신이 주류인 시대가 가고 파울라 같은 신인 화가의 새 시대가 도래한다는 위협감, 여성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다는 자존심이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릴케 : 독일의 유명 시인. 우리나라 시인 백석도 릴케를 사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에도 릴케의 이름을 언급한 바 있다.
짧지만 강렬한 파티, 세 점의 그림과 아이 하나
“난 30살 전에 성공하고 싶어. 진정한 내 것을 만들고 싶거든"
파울라는 "세 점의 훌륭한 그림을 완성한다면 웃으며 작별하겠다"고 다짐하듯 말한다. 세 점의 그림은 곧 그녀가 꿈꾸는 성공의 기준이다. 파울라가 느낀 감정 그 자체인 작품은 오롯이 그녀의 것이며, 작품을 완성함으로써 진정한 소유를 이뤄내는 것이기도 하다.
오래 살지 않겠다고 말하던 파울라는 실제로 31살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출산 후 걸린 색전증이 원인이었다. 10여 년의 길지 않은 작품 활동 기간 동안 그녀는 수백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녀가 바랐던 '훌륭한 그림 세 점', 그것을 넘어서는 성과였다. 그녀의 작품은 멕시코의 유명 화가 프리다 칼로 등 후대 여성 화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앞서 언급했듯 파울라는 서양 미술사 최초로 누드 자화상을 그린 여성 화가이다. 당시 여성의 누드 자화상을 스스로 그린다는 발상은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그녀의 누드 자화상은 단순히 여성의 몸을 아름답게 그린 것이 아니다. 그녀의 작품은 결혼, 임신과 같은 여성에 대한 당시 사회의 기대와 압박을 무너뜨리고 자유를 추구하는 투쟁을 담은 것이다. 여성을 관능에 대상에서 벗어나 한 명의 인간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다.
현재 그녀는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 화가이자 여성의 시선에서 여성의 신체를 표현한 최초의 화가로 인정받는다. 혹자는 그녀를 두고 독일의 피카소는 여성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세 점의 훌륭한 그림과 아이 하나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간 파울라.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간 그녀의 삶은 가히 성공적이었다.
글 | 이숙영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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