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다수의 관련 논문과 전문가의 자문을 참고한 글입니다.
*본 글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의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국 사회의 청소년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넷플릭스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
시즌 4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이 드라마는
마약, 우울증, 자살 등
미국 청소년들이 겪는 다양한 문제를 다룬다.
모든 사건이 충격적이지만
그 중 시선을 끌었던 사건은
성폭행 사건이었다.
야구부 주장 '브라이스'는
절친 '저스틴'의 여자친구인 ‘제시카'를 성폭행한다.
심지어 '제시카' 본인이 연 연말 파티에서 말이다.
제시카는 고민 끝에 재판에 나서
브라이스를 처벌해달라고 호소하지만
부유한 백인 남성이었던 브라이스는
고작 보호관찰 3개월 형을 받고 풀려난다.
그런데 판결 이후 제시카는
남자친구와의 잠자리에서
다소 과격한 행동을 보이는 등
전보다 성적으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 장면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해하기 딱 좋은 장면이다.”
성적으로 적극적인 제시카의 모습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다시 말하면,
제시카는
원래 성적으로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성폭행을 당한 게 아니라
성폭행을 당한 후
그 후유증으로
성적으로 개방적이게 된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안다.
필자 또한 당사자였으므로.
제시카 같은 사람들은 사건을 겪은 후
자신의 신체를 불결하게 여기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
오히려 이전보다 더 성적으로 개방된 태도를 보인다.
이런 사람들도 있다.
아픔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
제3자가 감히 판단할 영역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누군가는 "저러니까 당했지" 라고
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다움"을 요구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피해 전에는 처신을 잘했던 사람.
그리고 피해 후에는 끊임없이 아파하는 사람.
혹시 당신은
그런 사람만 '진정한 피해자'로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모든 피해자가
당신이 상상하는 피해자의 모습은 아니다.
여기,
당신의 상상과는 정반대인
피해자가 있다.
두 그림 중 무엇이
여성 화가의 작품으로 보이는가?
혹시
왼쪽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더 부드러운 느낌이라서?
왼쪽은
*명암 표현 기법을 개발해
르네상스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카라바조의 작품,
오른쪽은
카라바조의 영향은 받은
여성 화가 젠틸레스키의 작품이다.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 어두운 배경과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듯 환한 인물 간의 대비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만드는 회화 기법.
인물의 구성, 명암, 소재 등
두 작품은 얼핏 보면 비슷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다르다.
카라바조의 그림 속 여성은
본인이 직접 남성의 머리를 자르고 있는데도
허리를 꼿꼿이 펴고 팔을 쭉 펴서
그와 거리를 두는 모습이다.
내키지 않는 듯 보인다.
오히려 옆에 서 있는 노파가
얼른 끝내라며 종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소녀의 가냘픈 팔에서
건장한 성인 남성의 머리를 자를 만큼의 힘이
나오기는 할까 의문이다.
반면 젠틸레스키의 그림 속 여성은
남성을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름으로써
온 힘을 다해 머리를 자르는 모습이다.
함께하는 시녀 또한
자세를 잡아주며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여장부의 풍채를 가진 이 여성은
건실한 팔뚝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레퍼런스로서
많은 화가들이 그림의 소재로 활용했다.
같은 소재를 사용해
비슷한 느낌으로 그렸음에도
하나하나 뜯어보니 이렇게 다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화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17살부터 화가로 활동한 젠틸레스키.
젠틸레스키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후원자를 구하기도 힘들었고
화가 커뮤니티에 낄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인생을 뒤바꾼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아버지 친구 '타시'에게 당한 성폭행.
지금으로 따지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일이지만
16세기 당시의 차별적인 성관념은
젠틸레스키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사람들은 가해자 '타시'가 아닌
피해자 '젠틸레스키'에게 호기심을 가졌으며
7개월 간 이루어진 법적 공방은
'젠틸레스키가 성폭행 당시 처녀였냐'는 데
중점을 두고 진행된다.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성 경험이 있는 여자와 관계하는 행위는
강제적이더라도 성폭행이 아니었다.
재판부는 젠틸레스키의 증언을 검증한다며
고문을 가하기까지 한다.
이렇게까지 했으면 유죄를 줄 법도 한데
'타시'는 다른 혐의로 추방령을 받을 뿐,
성폭행 혐의에 대해서는
별다른 선고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젠틸레스키는
무너지지 않았다.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지도 않았고,
거기에 매몰되지도 않았다.
성폭행 경험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 결과물이
이 작품,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다.
혹시 알아차렸는가.
목을 베고 있는 여성은 바로
젠틸레스키 본인이다.
물론 목이 잘리고 있는 남성은
그녀를 성폭행했던 '타시'이다.
이토록 강인하고 당당한 성폭행 피해자.
그녀는 자신의 성폭행 경험을
예술로 승화해낸 화가로,
남성만 화가가 될 수 있던 당시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의 첫 여성 회원이었으며
현재는 최초의 여성주의 화가로서
여성 인권을 외친 선구자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여전히
“피해자다움”이란 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술을 좋아하지 않고
짧은 치마를 입지 않고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지 않아야만
온전한 피해자로서 '인정'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피해를 당한 후
두문불출하고
아파하고 슬퍼하며
삶이 무너져내린 모습을 보여야만
온전한 피해자로서 '인정'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파티를 즐기고 성적으로 개방적인 '제시카'나
성공한 커리어우먼 '젠틸레스키'는
진정한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500년 전 사람들이 저질렀던 실수를
지금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지 않길 바란다.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에 집중하길 바란다.
나이 불문하고 성실히 살아가던
한 청년의 생을
함부로 짓밟은 가해자에게
분노하길 바란다.
성범죄는
지금도 우리 사회의 주요한 문제이다.
최근 사이버 공간을 이용한
지능적이고 고도화된 성범죄가 등장하며
그동안 수면 아래 있던
수많은 피해자들이 드러났다.
피해자들이 부디
영혼의 상처를
끌어안지도, 외면하지도 말고
직시하고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올바르게 소화시켜
과거의 기억으로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혹시
그 아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 또는 전문가를 찾아가
털어놓고 털어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를 바란다.
젠틸레스키 또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카이사르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젠틸레스키가 한 고객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나와 같은 입장인 그대에게
감히, 그러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로를 전한다면
그 첫 번째는 그대가 될 것이다.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가장 큰 아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를
위로하거나, 격려하거나, 응원하고 싶지 않다.
얼굴도 모르는 나에게 토닥임을 받을 만큼
불쌍하고 나약한 사람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냥 한 마디만 하고 싶다.
꼭, 보란 듯이 잘 살아가길.
강인한 그대여.
글 | 에디터 B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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