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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Nov 12. 2020

당신이 모르는 에스메랄다의 ‘사랑’ 이야기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세 남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아름다운 집시 여인’.


©dropbox.com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주인공 '에스메랄다'를 설명할 때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 파리의 근위 대장 '페뷔스', 심지어 대성당의 신부 '프롤로'까지도 에스메랄다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든다. 에스메랄다는 이 세 사람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매력적인 존재로 보통 묘사된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성당 종지기 '콰지모도', 파리 근위 대장 '페뷔스', 신부 '프롤로' ©notre dame de paris musical



  그런데 의문이 든다. 에스메랄다는 그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 ‘아름다운 집시 여인’에 불과할까? 혹시 우리는 사랑받는 대상으로서의 에스메랄다에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에스메랄다가 세 남자의 사랑을 받는 것은 맞다. 그러나 오로지 사랑을 받는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열렬히 사랑하는 존재이자,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존재이다. 사랑받는 '대상'이 아닌, 사랑하는 ‘주체’로서의 에스메랄다는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에스메랄다의 사랑이 과연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작중 에스메랄다는 파리의 근위 대장 페뷔스를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페뷔스 역시 에스메랄다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순탄치 않다. 대성당의 신부 프롤로는 남몰래 에스메랄다를 사랑해 둘 사이를 질투했고, 페뷔스가 에스메랄다와 함께 있을 때를 노려 그를 칼로 찌른다. 실상은 이러한데, 신부 프롤로가 아닌 에스메랄다가 범인으로 지목된다. 마법으로 페뷔스를 유혹한 후 칼로 찔렀다는 누명을 쓰게 된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해명해보지만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녀가 다름아닌 ‘이교도 집시 여인’이기 때문이다.




©notre dame de paris musical



  뮤지컬의 배경인 15세기 당시, 프랑스에서 집시들은 차별 받는 존재였다. 그들은 다른 외모와 생활 방식을 이유로 거부당하고 배척당했다. 집시들은 흔히 약탈과 도둑질을 일삼는 존재로 여겨졌지만, 이는 집시들의 다양한 면모 중 일부일 뿐이었다. 집시들은 실제 그들이 저지른 일보다 더 심각한 수준의 범죄자 취급을 받고는 했다. 에스메랄다 역시 집시라는 이유로 페뷔스와의 사랑을 부정당하고 상해 사건의 범인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집시 복장을 입은 19세기 배우 패트릭 캠벨 ©pinterest



  이런 상황에서 에스메랄다와 페뷔스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페뷔스는 파리의 근위 대장이었고, 에스메랄다는 떠돌이 집시 여인이었다. 둘 사이에는 그들을 갈라놓는 거대한 현실의 장벽이 있었다. 어쩌면 사랑 때문에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에스메랄다는 페뷔스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녀의 결심은 넘버 ‘살리라’에서 잘 드러난다.




©notre dame de paris musical



  누명 때문에 갇혀 있던 감옥에서 도망친 에스메랄다는 넘버 ‘살리라’를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자유로운 삶을 향한 열망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 모든 두려움과 열망을 제쳐두고 끝까지 페뷔스를 사랑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에스메랄다의 ‘사랑’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에스메랄다는 페뷔스와의 사랑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본다. 그녀가 지금까지 자유롭게 춤추고 노래하며 살아왔던 세상. 그러나 결국엔 그녀가 이방인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이 불공평한 세상을 말이다. 에스메랄다와 페뷔스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은 그 둘만을 갈라놓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인과 집시 간의 장벽은 곧 그녀와 같은 모든 이방인들을 향한 차별이자 박해였다. 에스메랄다는 바로 그 장벽을 무너뜨려 불공평한 세상을 바꾸겠다고 노래한다. 변화를 통해 어느 누구도 차별 받지 않을 세상을 사랑하겠다고 말한다.



"우릴 가로막는 이 두 세상 다시 하나가 되는 날.
아, 그 날이 올 수 있다면 인생을 바칠 수 있어.
이 목숨도 아깝지 않아.

- 넘버 <살리라> 中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삶과 자유를 열망하는 에스메랄다지만, 장벽이 무너진 세상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렇듯 에스메랄다의 ‘사랑’은 점차 페뷔스 한 사람만이 아닌 세상 전체를 향해 나아간다.



©notre dame de paris musical



  에스메랄다가 평등한 세상을 향한 사랑을 다짐하는 한편, 페뷔스는 에스메랄다를 배신하고 약혼녀 플뢰르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주교의 명을 받아 근위대를 이끌고 집시들을 소탕하려 든다. 에스메랄다가 속해 있는 그 집시 무리를 말이다. 집시들의 우두머리 '클로팽'은 이에 맞서다 목숨을 잃고 만다. 성당에 숨어있던 에스메랄다는 클로팽이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장벽이 무너진 세상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노래하던 에스메랄다. 거리로 뛰어나오는 순간,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죽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망설이지도 도망가지도 않는다. 대신 클로팽의 뜻을 이어받아 집시들의 무리를 이끌며 저항한다. 
‘우리의 쉴 곳은 어디’냐고 외치며 근위대에게 맞서 저항하던 에스메랄다는 결국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에스메랄다를 그저 안타까운 희생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을 ‘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의지로 사랑을 택했다.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그 사랑을 뻗어나갔다. 페뷔스를 향한 사랑이 배신당한 순간에도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사랑을 위해, 그녀가 염원하던 모두를 위한 세상을 만들고자 투쟁했다. 흔히 '사랑이 세상을 변화시킨다'고들 말한다. 에스메랄다는 이 말의 진짜 의미를 자신의 생을 바쳐 관객들에게 전한다.



©dropbox.com



  ‘세 남자의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집시 여인’.


  물론 틀린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기엔 어떠한가? 과연 에스메랄다가 ‘세 남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아름다운 집시 여인’이기만 했는가?


  에스메랄다는 단지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사랑받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 또한 사랑하는 '주체'였다. 사랑의 대상 또한 단지 한 명만을 향하지 않았다. 평등한 세상에 대한 사랑을 품고 망설임 없이 나아갔던 에스메랄다의 용기를 바라보며, 그녀의 사랑이 지금 우리의 세상에도 닿길 간절히 바란다.





글 | 주소영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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