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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Sep 17. 2020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 시련을 이겨낸 명작

젊은 시절의 라흐마니노프. 얼굴 크기만 한 손이 눈에 띈다. 손 길이만 무려 30cm인 그는 한 손으로 도에서 다음 옥타브 라까지 연주한다. (사진 출처: senar.ru)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가, 라흐마니노프



미치지 않고서야 연주할 수 없는 곡, 영화 <샤인>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을 설명할 때 한 말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연주곡은 '피아니스트의 무덤'이라고 불릴 정도로 악명 높은 난이도를 자랑한다. 도에서 다음 옥타브 라까지, 13도의 음을 한 손으로 연주할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손을 가진 라흐마니노프에게 맞춰 작곡된 곡이기 때문이다.

라흐마니노프는러시아 출신의 마지막 낭만파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다. 러시아에서 오네그의 귀족출신으로 태어나, 2월 혁명을 피해 미국에 정착했다. 라흐마니노프는 4살 때 처음 모친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즈베레프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국민악파가 주를 이루던 시절 활동란 후기 낭만파 음악가로 부조니, 호프만과 함께 사실상 낭만주의 마지막 세대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곡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은 ‘피아노 협주곡 2번’이라고 할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과 함께 러시아 3대 피아노 협주곡으로 꼽히기도 한다.

2015년 KBS 클래식FM이 청취자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바에 따르면 피아노 협주곡 2번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 1위를 기록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팝송 에릭 카멘의 ‘All by myself’도 이 곡의 선율을 따서 만들어진 곡이다.

이 곡을 작곡하게 된 일화를 담은 창작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도 최근 4연을 올렸다. 극 중 음악은 대부분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 선율을 따왔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티켓 오픈을 하자마자 예스24, 인터파크티켓 창작뮤지컬 부문 예매율 1위를 기록했다.

이쯤되면 궁금해진다. 그를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만들어준 피아노 협주곡 2번에는 어떤 드라마틱한 일화가 숨겨져 있을까. 아래 음악을 감상하며 피아노 협주곡 2번에 얽힌 이야기를 읽어보자.






조성진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https://youtu.be/aNMlq-hOIoc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쓰기까지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성공이 없었다면, 라흐마니노프가 3번을 쓸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곡이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쓰기 전 라흐마니노프는 약 3년간 지독한 우울증을 겪었다. 그가 일 년 동안 매일 일곱 시간씩 공들여 작곡한 ‘교향곡 1번’이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연주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당시 지휘를 맡은 글라주노프가 술에 취해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라흐마니노프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교향곡 1번은 술에 취한 글라주노프의 엉터리 연주 때문에 큰 실패를 맞는다. 이 실패는 천재 피아니스트로 상승세를 달리던 그를 무기력증에 빠트렸다.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1번의 실패로 3년 동안 아무 곡도 쓸 수 없게 됐다.

교향곡 1번을 완성하기 이전부터 그는 개인사로 고통스러워 했다. 자신의 결혼을 반대하는 가족과 러시아 정교회와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사촌이자 동료 피아니스트였던 나탈리아 사티나와 오랫동안 사랑을 키워왔다. 아버지의 도박과 잦은 외도로 불행했던 라흐마니노프에게 사촌 나탈리아와의 사랑은 그를 지지해주는 유일한 힘이었다.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약속한 이들은 러시아 정교회와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사촌 간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역시 이 때문에 자신의 연인 예카테리나가 친척이라는 것을 속이고 결혼해야 했다. 사랑의 고통과 교향곡 1번의 실패는 그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노년의 나탈리아 라흐마니노프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사진 출처: senar.ru)



라흐마니노프는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평소 존경하던 톨스토이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라흐마니노프는 프로이트의 제자이자 최면 요법 치료사인 니콜라이 달 박사를 찾아간다. 니콜라이 달 박사는 3개월 동안 라흐마니노프에게 ‘자기암시’ 치료를 해준다. 자기암시 치료란 긍정적 최면을 통해 자신감을 향상시켜 우울증과 무기력증 등 부정적인 정서를 극복하는 치료법이다. 니콜라이 달 박사는 라흐마니노프가 계속해서 ‘당신은 새로운 곡을 쓸 것이고, 그 곡은 큰 성공을 거둘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읊조리도록 했다.






역경 끝에 만들어진 명작, 피아노 협주곡 2번



니콜라이 달 박사의 자기암시 치료 덕에 라흐마니노프는 우울증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다시 곡을 썼다. 3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피아노 협주곡 2번이 그가 오랜 슬럼프를 이겨내고 만들어낸 곡이다. 라흐마니노프는 감사의 표시로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곡을 헌정한다. 그리고 1901년 10월에 라흐마니노프는 모스크바에서 피아노 협주곡 2번 초연을 올리고 생애 첫 글린카 상까지 받는 대성공을 거둔다.



1악장 모데라토



1악장 '모데라토(Moderato)'를 듣고 있노라면, 눈보라 치는 시베리아의 설원을 걸어가는 한 남자가 보인다. 피아노 독주로 묵직하게 시작하는 악장은 휘몰아치는 추위에 코트를 꼭 부여잡고 눈 속에 푹푹 빠지는 발을 힘겹게 옮기는 나그네를 떠올리게 한다.

곧 클라리넷과 현악이 러시아풍의 장중한 제1주제를 연주한다. 이어 화려한 피아노와 관현악이 조화를 이루며 제2주제가 제시되며 곡이 전개된다.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무거운 분위기의 오케스트라는 라흐마니노프를 감쌌던 시련처럼 느껴진다.

특히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날카로운 피아노 소리는 듣는이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종결부에 들어가 피아노가 기교를 펼치는 가운데 행진곡풍으로 힘차게 마무리된다.




2악장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악장이 흐름에 따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던 눈보라는 봄바람이 된다. 겨울의 냉기를 담고 있지만 따듯한 환희와 기쁨이 가득한 바람이다. 봄바람이 가져온 2악장‘아다지오 소스테누토(Adagio Sostenuto)’는 몽환적이기 까지 하다.

부드러운 현에 이어 바순, 클라리넷, 호른이 꿈꾸는 듯 몽롱한 주제를 노래하고, 피아노가 플루트, 클라리넷, 현과 함께 환상적인 분위기를 이어간다.
어린 시절 할머니집 의 따뜻한 아랫목처럼 따듯하고 포근하다. 눈을 감고 있노라면 햇빛이 반짝거리는 숲속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3악장 알레그로 스케르찬도




‘알레그로 스케르찬도(Allegro Scherzando)’는 2개의 주요한 요소가 교대로 나타나는 자유로운 형식으로 현을 주제로 들뜬 듯한 리듬이 도입된다. 이는 곧 합주로 이어진다. 피아노가 이를 이어받아 글리산도 풍의 음형을 전개한 뒤, 스타카토의 제1주제를 씩씩하게 제시한다.

3악장에서는 1악장과 2악장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큰북과 심벌즈도 연주된다. 이어 오보에와 비올라가 부드러운 제2주제를 연주한다. 호수에 달빛이 번지는 모습처럼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연주가 지속된다. 이는 곧 긴박하면서도 희열에 찬 클라이맥스로 이어진다.

천국의 문을 여는 듯 화려하고 서정적인 클라이 맥스는 전쟁에서 승리를 얻어낸 듯 호쾌한 피날레로 끝을 낸다.시련을 이겨내고 피워낸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 자체로 라흐마니노프의 인생을 담고 있다.




글 | 박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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