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씨네필 흉내내던 관객의 부끄러운 고백
다르덴 감독의 영화를 보기에 앞서 드는 기대가 결코 건전한 마음이 아니었다는 걸 <소년 아메드>를 보러 가는 길에 알았다. 나는 그들의 영화를 기다리며 극중 인물들의 고통스러운 순간, 절망스러운 마음을 마주하러 갔다.
<아들>(2002)의 주인공이 자신의 아들을 죽인 소년을 성심껏 가르칠 때 느끼는 갈등과 <더 차일드>(2005)의 젊은 부부가 잃어버린 아이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애가 타는 마음. 그들이 느끼는 고통이 그래도 삶을 끝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다행스러운 감동이 위선적인 관객의 먹이가 되었다.
내 주변의 고통과 나 자신의 고통을 마주할 자신이 없기에, 스크린 너머의 나와 상관없는 사람의 ‘안전한’ 고통을 훔쳐보러 갔다. 결코 상관없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그들은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갈 것이라는 다르덴 형제의 희망을 우습게도 위안으로 삼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건조한 하루를 살아나갔다.
조용히 흔들리는 주변의 이야기
<소년 아메드>는 작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작품으로, 이미 두 번의 황금종려상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다르덴 형제(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의 9번째 장편 극영화다. 다르덴 형제는 그간 벨기에를 배경으로 불안정한 삶을 헤쳐나가는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담은 영화들을 발표해왔다.
이번에는 렌즈를 더 문제적인 곳 깊숙이 들여놨다. 극단적 종교주의에 빠진 무슬림 소년 아메드를 주인공으로 벨기에의 이민자 문제와 종교적 갈등의 문제를 다룬다. 자신의 선생님이 배교자라 생각해 직접 살해하려 하는 소년 아메드를 카메라는 울퉁불퉁한 화면 그대로(핸드헬드), 조금의 배경음악 없이 조용히 비춘다.
아메드가 되지 않는 나, 아메드를 따라가다
<소년 아메드>는 기존의 다르덴 영화들과 사뭇 다른 결을 가지고 진행된다. <로제타>(1999)의 소녀가장 로제타가 당장의 끼니를 구하기 위해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를 건너 늪지로 들어가 물고기를 낚는 장면이 수없이 반복될 때, 나 역시 로제타가 된다.
<내일을 위한 시간>(2014)의 산드라가 부당해고에 맞서 동료 직원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응어리진 마음을 토해낼 때, 나 역시 산드라가 된다.
하지만 <소년 아메드>의 아메드가 부엌의 과도를 양말 속에 숨기고 집을 나서 자신의 선생님을 찌르려 할 때, 나는 아메드가 되지 않는다. 그는 나와 다른 종교를 가진, 나와 다른 국적의, 나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아메드를 계속 따라가다보면 그가 과연 단지 이상한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3번이나 선생님을 죽이려 한 아메드에게서 친근함이나 이웃 소년의 인간미를 찾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는 과정 속에서 흔들리는 소년의 영혼을 본다.
아메드에게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며 통곡하는 엄마에게 티슈를 가져다주는 아메드. 농장의 소녀가 키스하고 싶다고 말하자 실소를 터뜨리는 아메드. 그를 긍정하기는 힘들다. 감정 이입할 마음의 여지 또한 감독은 쉽사리 주지 않는다. 서서히 흔들리고 달라지는 그를 우리는 따라갈 뿐이다.
영화가 시작될 때 카메라는 아메드가 계단을 급하게 오르는 장면을 비춘다. 불안정하게 초점이 나갈 듯 이어지는 계단의 오르막길에서 아메드는 열중한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비디오 게임에 빠져 있던 소년이 언제부터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정해진 시간에 알라신을 향해 기도를 드려야 하는 신앙심 깊은 무슬림이 되었다.
그 사이의 일들에 대하여 영화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따라가보라고, 지켜보라고 흔들리는 카메라는 담담히 말한다. 여기에 옳고 그름의 판단이나 교훈적인 메시지는 유보된다. 13살의 소년이 있을 뿐이다. 감독은 그가 영화 속에서만 움직이는 캐릭터가 아닌, 우리 주변에 존재하며 숨쉬고 있는 한 인간으로 그려지기를 바랄 것이다.
우리가 바랐던 아메드의 마지막 외침
불순하고 이질적이며 낯선 이와의 만남이 끊이지 않는
삶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아메드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안타까운 마음으로 외쳤다. 너를 세뇌시키는 못된 어른으로부터 어서 벗어나 너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이네스 선생님과 엄마를 불러보라고. 하지만 첫사랑 루이스의 고백에도 그의 신념은 돌아서지 않는다.
실제로 극단적 이슬람교에 빠진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까지도 자신의 종교에 끌어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위해를 가하는 데에도 서슴없다고 한다. 이것은 비단 특정 종교와 집단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아메드가 영화의 결말부에서 찾는 존재가 알라신, 이맘(그를 세뇌시킨 교단 지도자)이 아니라 “엄마”였다는 점이다. 흔들리는 그의 영혼을 계속 지켜보았기에, 그 흔들림 속에 따듯한 사람들의 손길이 있었다는 걸 우리는 알기에, 아메드의 이야기는 비극이나 비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르덴 감독은 씨네21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불순하고 이질적이며 낯선 이와의 만남이 끊이지 않는 삶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며 영화를 만든 의도를 밝혔다. 끝내 소년 아메드가 회복될 것이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맞춰 조화로운 삶을 살아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의 부드럽고 힘 있는 선율과 함께 <소년 아메드>는 관객의 마음속에 오래 울려 퍼질 것이다. 눈을 떼지 않고 그를 계속 지켜본 우리가 있기에, 또 주변에 우리의 눈길이 닿는 곳 어딘가에 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 | 송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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