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0년 만에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 수천 점을 남긴 화가,
반 고흐를 대표작 13점으로 만나다.
19세기 말,
당시 미술의 중심지는 파리.
아카데미 미술과 인상주의가 대립하며
유럽 예술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다수의 모작을 남겼으면서도
유행 사조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발걸음으로
고유의 화풍을 만들어낸 그.
빈센트 윌름 *반 고흐.
그의 작품세계는
다섯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
전기(~1885)
파리 시기(1886~1888)
아를 시기(1888.2~1889.5)
생 레미 시기(1889.5~1890.5)
*오베르쉬르우아즈 시기(1890.5~.7)
*'반 고흐'란 '고흐 마을 출신'이라는 뜻.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원문으로 Leonardo da Vinci, '빈치 마을 출신'이라는 뜻이다.
*시기의 명칭은 모두 고흐가 머물렀던 도시 이름을 따서 부른다.
#소외된이들을위한노래
#어두운화풍
#밀레
1. <감자를 먹는 사람들>
반 고흐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본인도 성직자가 되고자 했지만,
그림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
초기, 그의 관심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그림에 담는 것이었으며,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바로
전기 대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나를 진정한 화가로 거듭나게 한 작품"이라고 스스로 평가한 작품이기도.
이 시기 그의 그림을
잘 알려진 고흐의 대표 화풍이 아닌,
명암이 분명하고 테두리가 뚜렷하며 진한 화풍이다.
이유는 다름아닌 밀레에게 영향 받았기 때문.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과
<만종>으로 유명한 그 화가.
*영화 <완득이>에 나왔던 작품
초기에는 밀레의 화법을 따라하고
이후 밀레 작품을 오마주하는 등
고흐는 밀레를 존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끼요에
#아트딜러
네덜란드 출신인 고흐는
당시 여느 화가들과 같이
파리에서 정식으로 그림 공부를 하고 싶어했다.
파리로 넘어간 그는
인상주의 미술을 접하게 되는데,
그와 동시에
인상주의 화가들이 사랑한
*자포니즘과 *우끼요에에 큰 관심을 보였다.
*자포니즘 : Japanism.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하던 오리엔탈리즘 중 일본 문화를 동경하는 문화를 말함.
*우끼요에 :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의 일본 색판화. 서민 생활을 주로 다룸.
2. <비 오는 날의 다리>
우끼요에란 일본의 색판화로
강렬한 색채와 풍경 위주의 주제,
사람을 작게 그리는 것이 특징이며
고흐 또한 우끼요에에 빠져들어
모사를 자주 했다.
이 시기,
인상주의를 통해 점에 가까운 붓터치,
우끼요에를 통해
고흐 특유의 강렬한 색감을 체득한 것으로 해석한다.
3. <탕기 영감의 초상화>
고흐는 잘 알려진 자화상 말고도
다른 이들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으며
그 중 아트 딜러 탕기 영감을 그린 이 작품.
재밌는 것은 뒷배경에 우끼요에 그림들이 보인다.
당시 우끼요에의 인기를 확인 가능.
고흐의 동생 테오는 이 당시
이미 성공가도를 달리는 아트딜러였는데
안타깝게도 고흐의 작품들은 잘 팔리지 않았다고.
탕기 영감은
테오 이외에 고흐와 연을 맺은 아트 딜러.
이 시기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잘 팔리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화상을 그린 작품들이 다수 남아있다.
다시 말해 이 시기 초상화들을 살펴보면
영향력 있는 아트 딜러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셈.
유명해질 때 즈음 자살한 비운의 화가 고흐는
소위 '좋은 연줄'이 없어
생전 무명으로 살았다고 이해된다.
#화풍완성
#조울증
#정물
#일상
고흐는 대도시 파리에서 이방인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한적한 남부 도시 아를로 이사를 간다.
비록 고흐는 우울증을 앓다 고독하게 삶을 마무리한 화가지만
사실 고흐는 누구보다 사람을 좋아했으며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이와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고흐는 다른 예술가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싶어
근처 화가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하고 그와 실제 동거한 이는
익히 알고 있는 폴 고갱 정도.
4. <밤의 카페 테라스>
비록 사람과의 교류는 적었으나
이 시기 고흐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완성한다.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밤의 카페 테라스>.
찍어 누른 느낌의 붓질과
원색 위주의 색감이 눈에 띈다.
5. <씨 뿌리는 사람>
그리고 완성된 화풍으로
밀레의 작품으로 모사하기도.
6. <자화상> (1888)
고흐가 정신질환을 앓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귀를 자른 후 그린 그림도 유명한 작품.
그가 왜 정신질환을 앓았는지에 대해 설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고흐의 형에 대한 이야기.
고흐 이전 남자아이가 태어났는데
그의 이름을 빈센트로 지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가 죽고,
이후 태어난 고흐에게 죽은 형의 이름을 주었으니,
고흐가 죽은 형의 이름을 가지고 살면서
평생 죽음을 생각했기 때문에
정신이 건강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7. <해바라기> (아를, 4번째)
8. <아를의 방>
9. <집배원 조제프 룰랭의 초상>
고흐의 그림을 살펴보면
정물화와 일상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
소심한 성격 탓에 집에 머무르면서
근처 사물들을 그린 것.
집배원 또한 집에 우편물을 가져다주는 인물로, 일상의 일부분.
영웅이나 신화를 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상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대표작들
평화로운 소도시 아를에서 잘 지내는 듯 했지만
고흐의 감정 기복을 견디지 못한 고갱이 떠나자
정신병이 심해진 그.
이름은 생 폴 드 무솔 수도원.
사실상 정신병원에 보내진다.
마음이 어두워질수록
그의 캔버스는 더욱 밝아진다.
10. <별이 빛나는 밤>
그리고 정점에 다다라
미술사에 길이 남은 바로 그 작품,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강렬한 힘을 가진 그림.
11. <사이프러스 나무와 별이 있는 길>
고흐의 시그니처 화풍.
12. <정오의 휴식>
그리고 여전한 밀레 사랑.
#유작?
정신병원에서도 차도가 없어
고흐는 오베르로 이사해 생의 마지막 두 달을 보낸다.
13. <까마귀가 나는 밀밭>
고흐의 유작이라고 알려진 이 작품.
사실은 아니다.
고흐는 어느 날 총상을 입고 시름시름 앓다가
총상에 의한 감염으로 이틀 뒤인 1890년 7월 29일, 사망했다.
총상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한데,
자살 시도였다는 설이 주요하다.
그 외에도 동네 청소년들에게 실수로 총을 맞았지만
사람을 좋아하고 소심한 고흐의 성격상 자살로 위장해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렇게 고흐는 서른일곱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이제 막 주목받을 때 즈음,
예술사에 자신의 이름이 크게 새겨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면서-
모사로 시작했지만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나간 고흐.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라는
마틴 스콜세지의 말을
봉준호 감독처럼 인용해본다.
반 고흐,
그의 삶은 짧았으나
그의 예술은 영원하다.
나는 더욱더 내 자신이 되려고
노력했다.
남들이 그걸 원하든 원치 않든
신경 쓰지 않으면서.
- 반 고흐
글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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