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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Sep 17. 2020

목적 없이 무용하고 아름다운 시간_어쩌다 산책


지긋지긋한 장마가 끝나고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폭우와 폭염을 넘나들며 폭폭 찌는 여름의 공격에 정신 못 차리는 나날이 하루 이틀 쌓여간다. 반복되는 하루, 오늘 하루쯤 이렇게 흘려보내도 될 것 같은 무료함. 뭐를 해도 이미 해본 듯한 지루함. 그들에게 오늘 ‘산책’이라는 청량감 한 스푼을 처방해 본다. 
어쩌다 마주친 휴식을 닮은 이곳.

 


어쩌다 산책





카페와 서점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 이곳의 분위기는 사뭇 정적이게 느껴질 수 있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바깥세상과 잠시 작별하고 책장을 따라 느긋하게 산책하다 보면 어느새 이곳만의 시간으로, 느리게 감아지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어쩌다 산책 평면도



어쩌다 산책은 카페 공간을 중심으로 왼쪽엔 서점이, 오른쪽엔 프로젝트 룸이 있다. 계절별로 하나의 주제를 정해, 서점에서는 주제를 심도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을 소개하며, 카페에서는 제철 재료를 사용해 만든 시그니처 음료를 선보인다.
 
현재, 프로젝트 룸에선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의 ‘숲의 정경’을 오마주 하여 향기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1.<숲의 입구>, 2.<숨어 기다리는 사냥꾼>, 3.<고독한 꽃>, 4.<저주받은 장소>, 5.<정다운 풍경>, 6.<여인숙에서>, 7.<예언하는 새>, 8.<사냥꾼의 노래>, 9.<작별>
 
서점에선 다이앤 애커먼(Diane Ackerman)의 <감각의 박물학>에 영감을 받아, 다채로운 감각을 말하는 책 7권으로 여름 산책을 꾸몄다. 
b.<감각의 박물학>, c.<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d.<꿈의 꿈>, e.<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f.<소리 잃은 음악>, g.<희랍어 시간>, h.<향수>


[BOOK SHOP]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책장과 책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꽂힌 서점에 익숙하다면 이곳이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대형서점의 책들은 숨바꼭질하고 있다면 이곳은 책 하나하나가 전시된 느낌이다. 책들이 자신을 맘껏 뽐내고 있어 슥 둘러보아도 책의 제목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곳곳에 위치한 여백의 미에 책도, 산책자도 숨통이 트인다.





6층으로 나뉜 책장에, 책은 주로 산책자의 시선이 편하게 닿을 수 있는 2~5층에 놓여있다. 층별로 쭉 서가를 거닐다 보면 서점 4바퀴를 거뜬히 산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 서로가 서로의 산책을 방해하지 않게 조심하는 배려. 이곳이 산책로로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는 건 매일 찾아오는 산책자들이 스스로 이 공간을 소중히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PROJECT ROOM]



1850년 8월에 출판된 ‘숲의 정경’은 슈만이 당대의 낭만주의 문학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작곡한 9개의 피아노 소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제는 숲을 모험하면서 마주하고 경험하는 것들이다. 슈만이 활동했던 당시 독일의 예술가들에게 숲은 초자연적 힘에 의해 지배되는 신비로운 장소, 미지의 세계 그 자체였다. 그곳에서 인간은 문명의 한계를 극복할 희망을 되찾고, 새로운 이상을 꿈꿀 수 있었다. 





이번 향기 전시는 19세기에 제기된 문제의식을 21세기의 서사로 끌어왔다. 정신과 감각을 망각한 채 피폐한 물리적 삶을 이어가는 우리가 되찾아야만 하는 인간다움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9가지의 향기로 표현했다.



[코너 속의 코너_ EDITOR'S PICK]



<여인숙에서>


6.<여인숙에서>
여름밤 시원한 밤공기, 물기 머금은 나무와 매미소리를 향으로 전이시킨 듯하다. 
생기 가득한 잔향이 남는다. 
Scent Image_언제 떠올려도 그 계절, 그 밤, 그 공기를 소환하는 한여름 밤의 꿈.



<저주받은 장소>



4.<저주받은 장소>
처음엔 쓸쓸하고 날카로운 느낌에 향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오래된 책이나 마른 장작에서 나는 건조한 더스트 향이 감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부드러워지고 포근한 우드향이 남는다. 
Scent Image_고통 속에서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빚어내는 아름다운 향기가 가득한 숲.



<사냥꾼의 노래>


8.<사냥꾼의 노래>
청량한 소나무 산책길 끝에 물가에 다다랐을 때처럼 젖은 흙냄새가 코끝부터 시원하게 퍼진다. 
바람에 실려 온 풀 내음처럼 잔잔하지만 향긋한 잔향을 남긴다. 
Scent Image_아무도 없는 깊은 숲속, 우연히 발견한 호수.



[CAFE]



그린 포레스트



계절에 따라 시그니처 메뉴가 바뀐다. 이번 여름에 선보인 시그니처 메뉴는 그린 포레스트(Green Forest)이다.  그린 포레스트는 재스민, 라벤더, 라임으로 여름의 숲을 표현했다. 주인장의 팁에 따라 음료 속 생라임을 으깨면 여름의 싱그러움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린 포레스트와 그린 티 트라이앵글



그린 티 트라이앵글은 촉촉한 말차 시트에 단팥 크림을 샌드 한 달지 않은 케이크이다. 설산을 떠올리게 하는 겉모습은 여름에 만난 뜻밖에 광경이다. 눈과 입이 즐거워 사색과 공상에 곁들이기 좋다.





[INFORMATION]


서울 종로구 동승길 101 지하 1층
매일 12:00~21:00
문의 02-747-7147
인스타그램 @uhjjuhdah_promenade



어쩌다 산책은 ‘산책을 한다(promenade)’와 ‘어쩌다가 산 책(book)’이라는 두 가지 뜻으로 중의적 해석된다. 어쩌다 산책의 모티브가 된 책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산책자>이다. 


사실 산책자는 발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다. 발저의 글엔 늘 무력하고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등장한다. 그는 스스로 절필한 뒤, 매일을 걸었다. 그의 산책이 곧 그의 글이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모험가도, 탐험가도 아닌 산책자. 목적 없이 걸어도 괜찮다는 배려 깊은 단어다. 덕분에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노력 없이 마주친 보물이 된다. 작디작은 것도 보물로 만들어주는 힘. 그는 산책이 가지는 그 힘을 누구보다 절실히 깨달았다.



어쩌다 산책을 찾아가는 길. 지도 앱을 켜고 최단 거리, 최단 시간, 최소 환승을 이리저리 비교했다. 시간을, 체력을 최소한으로 쓰겠다는 어떠한 사명감에 사로잡힌 것도, 1~2분이라도 덜 걷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다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산책하러 가면서 최소로 걷는 길을 택한 것이다.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우리는 새로운 풍경을 볼 기회를 스스로 빼앗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쩌다 산책하는 법도 까먹게 됐을까...?' 

어쩌다 산책 역시 그냥 지나치기 쉽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숨겨져 있던 공간이 한눈에 드러난다. 입구를 찾기 힘들다는 산책자의 후기들도 보았다. 가는 길엔 길을 헤맬까 봐 걱정했지만, 나오는 길엔 길을 더 헤맸어도 좋았을 거라 생각했다.


[EDITOR'S THOUGHTS]



눈으로 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느낀다는 게, 그리고 표현한다는 게 참 어려웠다. 최진영 작가의 소설을 인용한 에디터의 소감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평소 일기를 쓸 때 제야는 단어의 한계를 답답해했다.
단어들이 너무 납작하고 단순해서 진짜 감정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바람이나 햇살, 풍경과 냄새를 표현할 때도 궁핍했다. 
입체를 평면에 구겨 넣는 것만 같았다.”

『이제야 언니에게 p13』 최진영 소설





글 | 조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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