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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Dec 10. 2020

조선의 애꾸눈 괴짜 화가 '최북'


최북(崔北, 1712~1786?) - 조선의 애꾸눈 괴짜 화가



이한철, 최북 초상, 19세기, 41.5×65.5cm, 최북미술관


  수염 사이로 보이는 굳건히 포갠 입술, 치켜뜬 눈 하나.

  외양부터 범상치 않은 이 인물이 바로 최북이다. 최북은 조
선후기의 유명한 애꾸눈 ‘괴짜’ 화가이자, 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기존 질서에 도전한 화가였다. 애꾸눈이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언제 어디서나 종횡무진으로 움직였던 그의 발길을 찬찬히 따라가 보자.









  18세기 조선은 철저한 신분 사회였다. 양반이 아니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사회에서 최북은 중인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무리 좋은 성과를 내도 양반이 아니라면 개차반 되기 일쑤였다. 그러한 양반 사회에서의 숱한 차별 때문이었는지, 최북은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옳지 않은 일이라면 단칼에 내쳤고, 기분이 좋으면 돈도 받지 않고 정성껏 그림을 그려주었다. 최북은 자신의 인생길을 온전히 자기 방식대로 나아갔다. 




너 같은 놈이 이 최북을 저버리느니
차라리 내 눈이 너를 저버리는 게 낫겠다.

(민병삼 장편소설, 「칠칠 최북」)




  최북의 애꾸눈 일화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단번에 알려준다. 어느 날, 남빛 도포를 입은 양반이 다짜고짜 그에게 산수화 한 장을 그리도록 요구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건방진 태도에 불쾌했던 최북은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하지만 그런 그를 향해 양반이 ‘환쟁이 주제에 양반을 능멸한다’고 소리치자, 최북은 그가 보는 앞에서 주변에 있던 송곳으로 오른쪽 눈을 찌른다. 화백으로서의 자존심을 포기할 바에야 화백의 눈을 포기한 것이 그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유명한 일화가 있으니, 바로 금강산 구룡연에서의 일화다. 금강산은 고금을 막론한 화백들의 ‘뮤즈’였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부터, 2018년 남북정상회담 때 언뜻 비췄던 판문점 평화의집 그림까지. 금강산은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 곁에 자리해왔다. 생각해보라. 웅대한 바위산이 제각각 높이 솟아 있고, 자연광을 머금은 나무줄기들이 요란하게 뻗어 있는 모습. 



최북, 금강산표훈사도 金剛山表訓寺圖, 지본담채, 57.5×38.5cm, 개인소장



  기분 좋게 취한 상태에서 이 거대한 장관을 마주한 최북은 갑자기 그곳에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 그리고 단호한 움직임으로 그대로 바위 위에서 몸을 날린다. 다행히 지나가던 사람이 구해준 덕에 살았지만, 그의 별난 행동은 참으로 상상 이상이다. 


  두 일화를 보며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미치광이라고,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불쾌하고 언짢은 느낌이 들어 난색을 보이고 있는가. 사실 그는 그저 소신대로 살았을 뿐이다. 최북의 인생은 오로지 최북의 몫이었다. 당신의 인생이 오로지 당신의 몫이듯 말이다. 신분 차별과 옳고 그름의 잣대에서 벗어나 훨훨 날아가고자 했던 그의 선택을 우리는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호생관(毫生館),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


  ‘호생관’은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최북이 스스로에게 붙인 호였다. 그만큼 그는 그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흘러넘쳤다. 당대에는 실력 있는 중인 출신 화가들이 ‘도화서 화원’으로 많이 발탁되곤 했다. 안정된 생활과 벼슬길이 보장됐던 터라 김홍도, 김득신 등의 당대 유명 화가들이 도화서 화원을 지냈다. 하지만 최북은 이를 거부한다. 왕실의 명령 아래 움직이는 ‘궁중 화원’이 아닌, 가난하지만 자유로웠던 ‘호생관’으로서의 삶을 택했다. 또한 술값으로 언제나 돈이 부족했던 최북은,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려내어 값을 치르기도 했다. 그림은 그의 정체성이자 인생의 전부였다. 그런 그가 특히 잘 그린 대상은 메추라기였다.



최북, 메추라기, 견본채색, 24×18.3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최메추라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최북은 메추라기를 즐겨 그렸는데, 그 이유가 뭘까. 


  그림 속 메추라기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한 발씩 내딛고 있다. 마치 목적지는 있지만 급하지는 않듯. 산비탈을 내려가면서도 시선은 줄곧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만을 보고 있지만 절대 넘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잔뜩 찌푸린 눈빛과 목을 쭉 내밀어 치켜 올린 부리. 조그마한 체구에서 터질 듯 뿜어져 나오는 성깔이, 왜인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혹시, 이러한 모습에 누군가 떠오르지는 않는가. 


  사실 메추라기는 예로부터 청렴한 선비를 상징했다. 보잘것없는 얼룩덜룩한 깃털 속에 기개를 품고 있는 모습. 마치 외양은 초라하지만 평생 올곧은 태도를 잃지 않는 선비의 모습과 닮아있다. 주변에서 어떠한 말을 해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을 것 같은 메추라기의 모습에, 최북 자신의 인생관을 투영한 듯하다. 그의 그림 속 메추라기는 언제나 나란히 발을 맞추며 걷고 싶게 만든다. 너울거리는 난초의 움직임을 느끼며, 느리지만 당차게.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눈보라 치는 밤에 돌아가는 나그네





  그림 속 지팡이를 짚은 나그네와 그 옆을 동행하고 있는 아이가 있다. 등이 한껏 굽은 나그네는 몇 걸음 걷지도 못할 정도로 나이가 지긋해 보인다. 둘은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앞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어떤 상황인 걸까.



  위 그림은 최북의 대표작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하단을 발췌한 부분이다.



최북,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人圖), 지본담채, 42.9×66.3cm, 18세기, 개인소장



  전체 그림에서의 나그네와 아이는 급격히 왜소해 보인다. 하얀 눈으로 덮인 산 뒤에 밤을 알리는 어둑한 하늘. 강풍을 온몸으로 받아 날카롭게 꺾여 버린 나무줄기들. 길에 바위는 또 왜 이리 많은지, 성긴 풀들과 엉켜 눈밭을 뒹굴고 있는 모습. 아이와 나그네가 왜 한마디 말없이, 걷기에만 집중하고 있는지 알 듯하다. 눈바람이 고막을 뚫고 들어와 온전히 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이토록 지난한 여정 끝에 나그네가 도달하려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진다.


  흥미롭게도 이 그림은, 최북이 두 손에 먹물을 묻혀 그린 지두화(指頭畵) 작품이다. 

   *지두화(指頭畵): 손바닥이나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서 그린 그림

  신체의 일부를 들여가며 그린 덕분인지, 극적이고 생생한 표현이 더 와닿는다. 손가락을 이리저리 놀리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온전히 자기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맞이하는 수많은 역경들. 그럼에도 의연하게 나아갔던 그 자신의 인생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수없이 손가락질 당할수록 더욱 살아나던 기개를, 그는 그의 열 손가락으로 꾹꾹 찍어냈다. 한평생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타협도 굴복도 없었던 인생. 

  그림 속 나그네는 어쩌면 최북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이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언제나 춥게 만든다. 하지만 이는 겨울날의 그림이어서가 아니라, 마음 한편이 주체할 수없이 시려오기 때문에 그렇다. 겨울에는 옷을 걸치면 되지만, 아린 마음은 옷 몇 벌로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다. 대상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만 비로소 따스함이 밀려온다. 대상의 ‘’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순간, 온기가 피어나게 된다. 










“눈보라 치는 세상 속,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최북의 한쪽 눈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몸 하나 가누지 못할 눈보라 치는 세상, 신분의 벽에 낙담했던 모든 순간들을 최북은 그 나름대로 이겨냈다. 인생을 통틀어 그에게 소중했던 것은 그림, 그리고 그 자신이었다. 그 둘이면 그로서 충분했다. 괴짜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세상 속에서 최북은 눈보라에 꿋꿋하게 맞섰다. 어쩌면 ‘괴짜’라는 수식어도 당대 사회가 배타적으로 정해 놓은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어려운 현실에 휘청거릴 때가 부지기수다. 나름대로의 고단함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갈 길을 몰라 헤매곤 한다. 결국은 쭈뼛쭈뼛 남들이 밟고 지나간 길을 쫓는다. 이렇게 가타부타 말없이 그저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들. 남들이 정해놓은 틀에 갇힌 채 눈치만 보고 있는 사람들. 부당한 요구에 거절하지 못하고 전전긍긍인 사람들. 그러다 결국,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 혹시 당신도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가.

  하지만 최북은 그림을 통해 말한다. “막힘없이 살아보자.” 

  눈보라가 아무리 거세어도 가야만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툭툭 털고 일어나 발걸음을 다시 옮겨야 한다. 그렇다면 이왕 사는 인생, ‘괴짜’로 한 번 막힘없이 살아보는 건 어떤가?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당당히 말하며 세상에 외쳐보자.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글 | 김은강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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