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을 통해 현실의 균열을 드러내다"
*해당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활한 이해를 위해 영화를 감상하신 후 읽으시길 권합니다.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 들뢰즈는 이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위대한 예술가는 심해로 내려가는 잠수부”와 같다고.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균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모두가 외면하기 급급한 진실을 목도하고 밝혀내는 자가 곧 '예술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들뢰즈가 언급한 예술가상에 걸맞은 영화감독을 언급하자면, 스탠리 큐브릭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혹자는 그를 거품이 잔뜩 낀 영화감독이라 평가하고, 반대로 누구는 그를 세기의 천재라고 예찬한다. 어떤 평가가 가장 적합하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는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감독이다. 그의 대표작 <시계태엽 오렌지>는 감독의 평판을 그대로 따라간다.
항상 논란의 중심에 있는 영화, 원작 소설과 다른 결말을 선택해 원작자의 미움을 산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봐야만 하는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는 감독의 초상인 동시에 그의 작품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큐브릭은 자신의 영화 속에 혼란스럽고 불쾌한 상황을 상정해 관객의 의식에 괴리를 추동한다. 이때 관객은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의 균열'에 자리한 추악한 진실을 훔쳐볼 수 있게 된다. <시계태엽 오렌지> 역시 이와 같은 효과를 수반한다. 이를 위해 영화에서는 대립하는 두 항이 만나 새로운 요소를 만들어내는 정반합의 구조와 역설을 도구로 사용한다. 주인공을 포함한 모든 등장인물과 영화의 서사는 충돌하는 정보 값의 결과물이고 역설 가운데 놓여 있다.
주인공 알렉스는 속물근성에 찌들어 있는 인물이다. 베토벤을 찬양하고 셰익스피어 연극에서나 사용할 법한 말투를 사용한다. 교양인의 취미를 내재화하고 귀족의 행실을 실천하고자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동물적인 본능을 마구 표출한다. 여성을 강간하고 노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쾌락을 느끼고, 자신의 ‘아래’에 위치한 자가 “기어”오르자 이를 폭력으로 다스린다. 다시 말해 윤리, 정의, 이성 등 인간을 정의하는 요건과는 거리가 먼 존재이다.
이는 알렉스의 방을 포착한 몽타주를 통해서 더욱 명확해진다. 알렉스의 방은 여성의 나체 사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조각상, 그리고 베토벤의 장식물이 혼재하는 공간이다.
알렉스의 방은 알렉스라는 인물 자체에 대응해 그가 원초적 본능과 이성의 영역이라 여겨지는 “교양”이 뒤섞여 존재하는 인물임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정리하면 알렉스는 이성과 비이성이 만나 탄생한 괴물이며, 반대되는 두 요소의 결합인 정반합 구조로 상징화할 수 있다. 관객은 알렉스의 초상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가갈 여지를 발견하게 된다.
알렉스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역시 역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알렉스를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과 연관 짓게 한다. 알렉스의 부하였던 조지와 딤은 자신들에게 폭력적인 알렉스에게 불만을 품고, 비행을 저지르던 도중 그를 배신하고 감옥에 처넣는다. 이후 조지와 딤은 경찰이 된 채로 “루도비코 요법”을 통해 범죄 의지를 거세당한 알렉스와 마주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조지와 딤은 그토록 싫어했던 “폭력”을 도구 삼아 알렉스를 응징한다.
알렉스와 부하들에게 습격을 당했던 작가는 루도비코 요법을 채택한 정부의 비윤리성을 고발하려 한다. 그러나 그는 알렉스가 루도비코 요법의 부작용 때문에 베토벤 9악장을 들으면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음악을 통해 알렉스를 고문하고 희열을 느낀다. 고문 도중 알렉스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루도비코 요법을 강행한 의원은 입원한 알렉스를 찾아와 그에게 친구라는 호칭까지 사용하며 친근하게 말을 건다. 그러나 허물없는 말투로 “편익을 봐줄 테니 루도비코 요법에 대해 함구하라”는 가장 계산적인 제안을 한다.
이런 알렉스의 일대기는 고대 그리스 비극과 닮았다. 알렉스가 감옥 수감이라는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루도비코 치료에 자원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대부분 선한 영웅이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의하여 불행을 겪는 이야기를 그린다. 알렉스는 잘못된 선택을 통해 고난과 역경을 겪고, 관객은 악독한 그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통쾌해하기보다는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큐브릭은 영웅답지 못한 알렉스를 영웅의 비극 서사에 끼워 넣어 관객에게 뒤틀린 신화를 제공한다. 인간답지 못한 인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실존을 이루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속삭인다. “과연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
감독은 원작과 180도 다른 결말을 제시함으로써, 질문에 대한 그 나름의 대답을 전한다. 원작 소설에서 알렉스는 모든 사건 이후 폭력에 흥미를 잃고, 베토벤이 아닌 독일 가곡에 관심을 갖게 되며, 가정을 꾸리는 것을 고려한다. 즉, 원작자는 알렉스가 외부의 힘에서 벗어나 선함과 정상성을 스스로 선택할 가능성을 비추며 이야기를 일단락 짓는다. 반면, 영화 속 알렉스는 변하지 않는다. 그는 눈밭에서 유사 성행위를 즐기는 여성들과 그들을 관음하는 부르주아 계층을 상상하며, 자신이 “치료되었다”며 만족한다. 이렇게 영화는 끝난다.
즉, 큐브릭은 '자유의지'야말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고 답한다. 비록 개인이 비인간성에 안주하더라도,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채 “인간성”을 추구하도록 떠밀리는 상황보다는 낫다고 말한다. 스탠리 큐브릭은 역설과 불쾌한 상황으로 무장한 영화를 통해 현실의 균열 사이에 존재하는 추악한 진실을 제시한다. 범인(凡人)은 보지 못하는, 혹은 외면하는 진실과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감독, 스탠리 큐브릭은 가히 위대한 존재이다.
글 | 이의영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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