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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Dec 16. 2020

그들의 옷에 주목하라 | 마츠 에크의 <지젤>


  아름답고 순진한 처녀도, 따뜻하고 친절한 마을사람들도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굳은 표정의 인간들과 몸을 뒤트는 정신이상자들뿐이다.



안무가 마츠 에크(Mats Ek)



  라인 강변에 사는 아름다운 처녀를 정신병원 수감자로 바꿔 놓은 이는 바로 스웨덴 출신의 안무가 마츠 에크(Mats Ek)이다. 마츠 에크의 <지젤>은 낭만발레 <지젤>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동일한 아돌프 아당스(Adolf Adams)의 음악이 배경이지만 무대장치, 안무, 분위기가 판이하다.












원작 <지젤>  vs 마크 에츠 <지젤>



먼저 고전발레 <지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막

  라인 강변의 시골 마을을 찾아온 귀족 청년 '알브레히트'는 재미로 어느 농가의 문을 두드려보는데, 그 집에서 나온 순박한 시골 처녀 '지젤'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부끄러워 집으로 들어가려는 지젤을 만류하고 자신과 어울려 놀기를 간청한다. 마을 청년 '힐라리온'이 이를 목격하는데, 그는 지젤을 귀찮도록 따라다니며 사랑을 표현하는 자이다. 지젤을 두고 알베르히트와 힐라리온이 대치하지만, 알베르히트는 지젤을 붙잡는 힐라리온을 물러가게 하는 등 지젤의 호감을 사 연인이 된다.

  같은 날 지젤의 마을에 귀족 무리가 찾아오고, 지젤과 그녀의 엄마는 그들을 극진히 대접한다. 귀족 여인 '바틸드'는 답례로 지젤에게 목걸이를 선물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지젤은 힐라리온의 폭로로 인해 알브레히트가 평민인 자신과 결혼할 수 없는 귀족이며, 심지어 바틸드가 알브레히트의 약혼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원래부터 심장병을 앓고 있던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아 미쳐버리고,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다가 심장마비로 죽는다. 

2막

  밤이 어둡게 깔린 숲속, 지젤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여인들의 유령인 ‘윌리’ 중 하나가 된다. 윌리의 왕인 '미르타'는 지젤을 추모하러 무덤을 찾은 힐라리온을 심판한다. 그를 연못에 빠트려 죽인 윌리들은 뒤이어 온 알베르히트 역시 단죄하려 하나, 지젤이 이를 막아선다. 지젤은 알베르히트와 함께 윌리들의 앞에서 최후의 춤을 춘다. 알브레히트가 탈진해 쓰러졌을 때 끝내 새벽종이 울리고, 미르타를 비롯한 윌리들은 사라진다. 그는 지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뼈아픈 회한을 느끼며 새벽을 맞이한다.




Svetlana Zakharova, “Giselle” ©Gene schiavone




마츠 에크의 <지젤>의 줄거리는 원작과 거의 비슷하나, 두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첫 번째로, 2막의 배경이 몽환적인 숲속이 아닌 정신병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지젤은 심장마비로 죽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상자로 병원에 수감되며, 유령들인 ‘윌리’는 하얀 병원복을 입은 환자들로 표현된다.  

  두 번째로, 2막에서 윌리에게 심판받아 죽는 힐라리온이 끝까지 살아있다는 점이다.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알베르히트를 용서하며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그럼으로써 힐라리온은 연적을 미워하던 평면적인 캐릭터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여자를 미치게 한 자를 용서하며 입체성을 가지게 된다.












그들의 옷에 주목하라



  마츠 에크의 <지젤>을 읽는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옷'이다. 등장인물들의 옷은 크게 두 가지, 흰 옷과 검은 옷으로 나뉜다. 이 작품에서 흑백은 '배척하는 자들'과 '배척받는 자들'을 나누는 코드이다.




1막-검은 옷의 사람들



알브레히트와 하인(좌), 알브레히트와 지젤(우) ©dancedarlingdance



  마츠 에크의 <지젤>은 첫 장면부터 흑백코드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알베르히트는 첫 등장부터 자신의 하인과 다르게 흰 옷을 입고 나온다. 이는 알베르히트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본성적으로 독특한 면이 있는 인간임을 암시한다. 하인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마을을 돌아다니던 그는 분홍 옷을 입은 지젤을 만난다. 


  검은 옷도 흰 옷도 아니지만, 지젤은 원작과 다르게 순진하다기보다 어딘가 모자란 면이 있는 듯하다. 마치 분홍색이 의미하는 천진난만함처럼 말이다. 어린아이처럼 몸을 배배 꼬는 그녀는, 놀랍게도 알베르히트의 마음을 순식간에 녹여버린다. 그들은 서로가 비슷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빠르게 가까워진다. 즐겁게 춤을 추며, 지젤은 알베르히트의 겉옷을 벗긴다. 




지젤과 알베르히트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좌), 지젤과 알베르히트를 막아서는 힐라리온(우) ©dancedarlingdance



  반면 마을 사람들은 전부 검은 옷을 입고 있다. 마츠 에크는 이 작품에서 정확한 군무를 위해 오케스트라 대신 녹음된 음악을 썼다고 하는데, 이는 획일적인 검은 의상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연출이다. 마을 사람들은 어린아이 같은 지젤에게 호의적이지만, 알베르히트에게는 눈에 띄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검은 옷의 힐라리온은 의도적으로 둘 사이를 떼어 놓고 지젤을 격리하려 하기까지 한다.




귀족들(좌), 약혼 사실을 알게 된 지젤(우) ©dancedarlingdance




  다음으로 귀족들이 등장한다. 그들 역시 검은 의상을 입고 있다. 낭만발레 <지젤>의 줄거리와 동일하게, 귀족 여인 바틸드와 알베르히트의 약혼 사실이 밝혀진 후 지젤은 미쳐버린다. 





2막-흰 옷의 사람들



정신 병동에 수감된 여인들(좌)와 미르타(우) ©dancedarlingdance



  2막, 신비한 숲 속 대신 등장하는 장소는 정신 병동이다. 분홍 옷의 지젤은 알베르히트의 배신으로 인해 하얀 옷을 입고 병동에 갇힌다. 이 곳은 불구자로 낙인찍힌 이들의 백색 군무가 펼쳐지는 곳이며, 완전한 배척과 고립의 공간이다. 그들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고 시종일관 바닥을 기며 몸부림친다. 여기서 윌리들의 여왕인 미르타는 정신병원 간호사로 등장하고, 환자들은 미르타의 헌신적이지만 단호한 손길 아래 다스려진다. 



지젤과 힐라리온(좌), 지젤과 알베르히트(우)  ©dancedarlingdance




첫 번째로 병동을 찾은 사람은 바로 힐라리온이다. 그는 지젤과 소통하려 하나 지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비탄에 빠져 떠난 힐라리온에 뒤이어 알베르히트가 병동을 찾아온다. 지젤은 사랑했던 남자인 알베르히트를 알아보는듯 그의 옆에 머물고, 두 사람은 마지막 2인무를 춘다. 


  왜 지젤은 알베르히트만 알아보았을까? 지젤은 마을에서 통제와 보살핌을 받던 인물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에게 호의적으로 대하지만, 이는 지젤이 모자란 사람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지 결코 사람들이 그녀를 동등한 위치로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알베르히트는 이러한 시혜적인 태도를 가지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알아본 이유는 그가 자신과 같은 눈높이에서,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춤을 춰 준 ‘유일한 공감자’였으며, 동시에 대등한 연인관계였기 때문이다. 힐라리온은 단 한 번도 지젤에게 의미 있는 자가 아니었으니, 지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체가 된 알베르히트 ©dancedarlingdance



  꿈 같은 순간도 잠시, 윌리들은 다시 미쳐 날뛰기 시작하고 지젤 또한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되돌아간다. 알베르히트는 마치 자신도 무리에 속하고 싶은 듯, 격렬하게 몸을 비트는 윌리들과 함께 춤을 춘다. 이는 낭만 발레 <지젤>에서 알베르히트가 미르타의 힘에 의해 강제로 윌리들과 춤을 추는 장면과 대비된다. 알베르히트는 한 겹씩 옷을 벗기 시작하고, 결국 나체가 된다. 1막에서 지젤이 그의 옷을 벗겼던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알브레히트가 스스로 옷을 벗어던진다. 


  이 장면은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흑백 코드’에 대한 완전한 거부이다. 1막의 지젤이 그랬듯, 알베르히트는 흰 옷도 검은 옷도 입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회귀한다. 획일성을 강요받지도, 낙인 찍혀 배척받지도 않던 가장 태초의 상태로, 아무 죄도 짓지 않았던 ‘원점’으로.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과거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고, 회한이며, 사랑이다. 






피날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담요를 덮어주는 힐라리온(좌), 하늘을 바라보는 알베르히트(우) ©dancedarlingdance




  덧없는 한 바탕의 꿈처럼 지젤과 정신병동은 사라지고, 혼자 남은 나체의 알베르히트는 짐승처럼 무대 위를 헤맨다. 바닥을 뒹구는 알베르히트에게 손길을 내미는 것은 다름아닌 힐라리온이다. 힐라리온은 발가벗은 알베르히트를 막대기로 몰아세우는 듯하더니 무대 밖에서 담요를 가져와 그의 몸을 감싸준다. 알베르히트는 담요를 두르고 우뚝 서서 고요히 하늘을 바라본다. 무대의 막이 내려간다.

    그렇다. 결국 용서할 수 없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 비참함을 뒤로 하고 새로운 발자국을 떼는 것, 그리고 회한을 딛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누군가를 배척하기보다는 포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마음이다. 알베르히트 또한, 할라리온이 건네준 것을 덮으며 흑백의 구분을 깬다. 알베르히트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 것은 새벽의 일출인 동시에 미래에의 희망, 인간성에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알베르히트가 그의 삶을 계속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츠 에크의 <지젤>은 이렇게 비관이 아닌 낙관으로 끝을 맺는다.












마츠 에크는 <지젤>을 통해 현대인의 병든 정신성을 말했다. 그러나 왜 <지젤>이었을까?


  원작인 고전발레 <지젤>은 사랑을 노래한 줄거리, 몽환적인 무대와 아름다운 안무 등 낭만주의 발레의 대표격으로 뽑힌다. ‘순수한 처녀의 죽음을 뛰어넘은 사랑’이라는 주제는 전형적이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이고 납득하기 힘들다. 클리셰 범벅의 어이없는 줄거리를 잘 포장한 산물 같기도 하다. 마츠 에크는 이렇게 어색하게 포장된 아름다움을 한 겹 벗겨내면 그 속에 병든 인간들의 모습이 보인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1막에서 그의 ‘비꼬기’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는 순수성을 새롭게 해석한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순수의 찬미’가 아닌 ‘순수의 격하’이다. 마츠 에크의 <지젤>에서 ‘순수’는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지도, 노동력을 제공해 도움을 주지도 않는다. 아름답고 순진한 처녀는 어딘가 모자란 천덕꾸러기가 되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인간이 된다. 지젤은 마을 사람들의 획일적인 검은 복장과 달리 혼자서만 생뚱맞은, 심지어는 위태로워 보이는 분홍빛의 의상을 입고 있다. 


  게다가 2막의 '윌리 군무'는 그 기괴함으로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원작의 ‘윌리 군무’가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는 것과는 반대로, 마츠 에크의 <지젤> 2막에 나오는 ‘환자 군무’는 기괴함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마츠 에크는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던’ 고전을 완전히 뒤틀어 버림으로써 기형적인 현대 사회와 그에 대한 뼈아픈 성찰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이것이 진짜 인간들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한다. 


  흰 옷을 입은 정신병자들의 군무를 보며,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흰 옷의 사람들과 달리 정상인이고 따라서 검은 옷을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마츠 에크는 검은 옷의 사람들 역시 '병든 인간'이라고 말한다.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이랄 것 없이 모두가 조금씩 비정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츠 에크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희망'을 논한다. 할라리온이 알베르히트를 용서했듯, 우리 사회가 타인을 이해하고 공존하고자 한다면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누군가를 낙인 찍어 배척하는 행위는 스스로가 정신이상자라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흑백의 관점을 벗어던지고, 떠오르는 새로운 태양을 바라봐야 하리라. 




글 | 강운지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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