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그림을 “보고” 음악은 “듣는다”.
그런데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안다. 뛰어난 작품들은 닮은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바로 마음을 움직이는 힘 말이다. 감정의 파도는 매체의 경계를 허물기 마련이다.
어떤 그림은 장송곡이 울려퍼지는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또 다른 그림은 공원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를 연상시킨다. 추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지게 만드는 음악도 있다.
예술이 감정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오늘의 주인공을 만날 때가 되었다.
한 번 그림을 “듣고” 음악을 “본다” 고 말해 보자.
이는 바실리 칸딘스키를 부르는 주문이다.
“뜨거운 추상의 대가” 라는 타이틀이 칸딘스키를 따라다닌다.
그 배경에는 20세기 초 유럽 세계의 변혁이 자리한다. 이성과 합리를 내세우던 기성의 사유가 뒤집힌 시기, 지식인들은 겉으로 관찰되는 모습(외면)보다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미스터리(내면)을 탐구하기로 한다. 여기에 추상 미술이라는 사조의 근본이 있다. 새로운 예술가들은 더는 현실을 모사하길 거부한다. 그리고는 감정과 사유의 세계에서 유영한다.
대가라는 말은 흔히 최초나 최고를 의미한다. 이단아들의 온갖 실험적인 시도 가운데 칸딘스키는 단연 독보적인 플레이어가 된다.
그는 예술이란 감정으로 향하는 여정이고,
작품은 살아 숨쉬는 에너지를 관객의 내면에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며,
모든 예술은 감정이라는 최종 목적지에서 만난다고 믿었다.
그는 예술을 매체와 재료로 단절하지 않고,
오직 생동감이 가득한지 죽어 있는지로 판단했다.
칸딘스키의 시선과 행보는 흡사 파도 위에서 균형을 즐기는 서퍼를 연상시킨다. 그가 지휘한 물결은 음악과 조형, 기호와 문법의 교향곡을 이룬다. 다음의 작품 세 점을 따라가며 들어 보자.
위 그림이 들리는가?
가로로 누운 선들은 정적이고, 다채로운 도형들은 생기발랄하다. 책이나 악보를 읽듯이 왼쪽 위에서부터 오른쪽 아래의 순서로 따라가야 할 듯한 느낌을 준다. 도형들은 마치 오선지 위에서 춤추는 음표를 닮았다.
뛰어난 즉흥 연주자라면 선율과 리듬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흥 연주자가 아니더라도 창의력을 발휘해 볼 만하다. 춤을 못 춰도 흥겨운 리듬에 몸을 맡길 수 있듯. <연속> 이라는 제목과 같이 내적 댄스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무엇이 들리는가?
하나의 면에 악보와 도형이 함께 그려져 있다. 언뜻 보기엔 장난 같다. 그러나 곧 흥미로운 점이 눈에 들어온다. 윗 줄과 아랫 줄이 닮았다는 사실이다.
악보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 이다. 클래식을 모르는 사람도 [따다다 단-] 으로 기억하는 모티프에 네 개의 음표가 대응한다. 악보 아래에는 여덟 개의 검은 점이 음표를 대신한다. 점의 위치는 음의 높낮이를, 점의 크기는 소리의 강세를 의미한다. 페르마타 기호도 빼먹지 않는다. 점에 인접한 삼각형의 길이만큼 소리를 지속하라는 뜻이다.
도형으로 그려진 음악은 직관적이다. 전통적인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도 손으로 점들의 나열을 따라가면서 클래식을 흥얼거릴 수 있다. 낯선 기호라는 은밀한 언어를 구사하는 짜릿함도 느껴진다. 자유로워 보여도 마냥 제멋대로는 아니다. 비록 전통적인 악보에서 해방되었지만, 특정한 형태가 소리를 표현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앞에서 본 그림이 음악을 닮았다면, 도형 악보는 음악 그 자체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리를 들어 내라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칸딘스키는 예술의 통합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마치 음표가 소리에 대응하듯, 어떤 경험들은 우리의 감정과 직결되어 있음에 주목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작품은 감정을 조준해 저격해야 한다. 그리고 예술가는 작품을 전략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그는 예술가들을 위한 지도 제작자가 된다. 한동안 회화 작업을 멈추고 저술에 몰두한 그는 이론서를 출간하고 예술 교육 기관인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친다. 그는 예술을 이루는 외적인 요소와 내적인 에너지의 관계를 다룬 문법을 세운다. 그리고는 “Composition” 이라고 명명한 이론과 동명의 작품 연작을 세상에 내놓는다.
“바늘은 뾰족한 금속이다 — 차가움,
판재는 매끄러운 동판이다 — 따뜻함 … ”
칸딘스키의 예술가는 다양한 재료와 규칙을 이용해 감정을 다루는 마술사다.
관객의 가슴 속 기쁨과 슬픔, 환희와 절망의 주소지를 정확히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다. 건축물처럼 치밀하고 유리처럼 정제된 작품을 매개로 말이다.
미술과 음악의 통합을 하나의 방법으로 이용한 칸딘스키. 그는 화가지만 음악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어느 날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1850) 을 보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영혼 속에서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거칠고, 광기에 가까운 선들이 눈 앞에 그려졌다.
(I saw all my colors in spirit, before my eyes. Wild, almost crazy lines were sketched in front of me.)”
어느 날 눈 앞에 음악이 그려질 때, 혹은 귓가에 그림이 들려올 때면 가만히 집중해 보라. 작품은 그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찰나에 흘러 넘치는 당신의 감정이 예술의 목적이기에.
글 | 이예림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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