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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Feb 06. 2021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작가, ‘이불’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전시관을 나오는 관람객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일제히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움켜쥐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바로 한 작품 때문이었다.



Hayward Gallery




  제목은 <화엄>. 화려한 구슬로 장식한 생선을 비닐봉지에 담아 전시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생선이 썩으면서 심한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악취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자 작품의 일부는 개막 다음날 바로 철거되고 만다. 이 작품은 당시에 국제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작가가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이 들끓었다. 논란의 작품을 제작한 장본인이자 악취를 선사한 인물. 그 작가가 바로 이불이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





  이불이 태어난 연도는 1964년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기이자 유신헌법이 제정되기 8년 전인 해. 권위주의적 독재 체제와 장기집권이 싹트던 시점에 그의 부모는 좌익 정치 운동가였다. 수시로 집에 드나드는 경찰들과 정부의 감시를 피해 이불 가족은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정치적 수난 속 온갖 부조리함과 불의를 보고 자라온 유년시절은 어린 그에게 작지만 굳센 포부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

실제로 그가 후에 제작한 아래 설치작품은 그 포부를 잘 보여준다.




Hayward Gallery




  멀리서는 이 작품이 그저 평범한 얼음 덩어리로 보인다. 하지만 한걸음씩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람 한명이 그 안에 갇혀있음을 알게 된다. 꽁꽁 언 얼음 속 인물은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제목에 명시된 ‘다카키마사오(Takaki Masao)’는 그가 창씨개명한 이름이었다.

  이불이 이로써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간단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불 개인의 의식을 ‘이념’으로 풀어낸 것이 아닌 ‘예술적 시각언어’로 풀어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그가 포부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그는 보는 이의 동조를 호소하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시각적 자극을 통해 무엇이 옳은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기회를 줄 뿐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 아니었을까.  





노력은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를 갈구하던 이불에게도 한계가 찾아왔으니, 바로 ‘동양인’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국제무대에서의 그는 한없이 작았다. 넓은 바다 속에서 작은 물고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하지만 물고기는 오히려 이것이 바다를 바꿀 기회라고 생각한다. 정치에서 인종·젠더로 스펙트럼을 넓혀 더 큰 세상의 변화를 이끌 기회였다. 이렇게 그는 유년시절의 포부를 꺼내들어 한계에 당당히 맞선다. 특히 초반에 언급한 <화엄>에서 이불의 결단력이 돋보인다. 작품이 철수되자 미술관 관계자는 모든 상황을 작가 책임으로 돌린다. 동양인 여성이기에 당했던 모욕이었다. 이불은 이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먼저 그는 계약위반 고소장으로 정정당당하게 손해배상을 받아낸다. 그리고 쌓인 울분의 경험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킨다. 


바로, 그의 ‘몸’을 이용해서 말이다. 






여성작가, 그것도 아시아의 여성작가라는 내 정체성은 국제무대에서 핸디캡으로 작용할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나의 태생적 환경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그 핸디캡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 신경숙 외 18인, 『땀방울에 비친 그녀들의 이야기』, 한국직업능력개발원, 1999.





광주비엔날레




  위의 작품은 이불 자신이 직접 나체 상태로 매달리는 퍼포먼스 형태로 진행되었다. 작가 개인에게 몸은 핸디캡이었다. 이불은 그 핸디캡 자체를 예술로 끌어왔다. 자신의 한 몸을 내바쳐서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동양인 여성의 적나라한 몸에서 비롯되는 성차별적 시선들과 억압들을 고스란히 마주한 관객들은 처음엔 의문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저 여성은 왜 자신을 고통 속에 내몰면서까지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있는 걸까.’ ‘흥건한 땀과 거친 호흡이 섞인 저 여성의 몸짓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그리고 거꾸로 매달린 여성의 눈빛에서 관객들은 작가 개인의 삶 속 고통과 울분을 읽게 되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아주 잠깐이라도 고통과 차별이 없어지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이불의 발화는 그대로 보여주는 식이었다. 그의 언어인 ‘몸’을 통해서, 꾸밈없이 적나라하게. 그리고 이로써 보는 이는 나름의 방식대로 더욱 강하게 공감한다. 적막 속에서의 공감으로 개인의 한계가 모두의 마음이 되고, 새로운 세상이 된다. 

이불의 몸이 직접 주체가 되는 퍼포먼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Southbank Centre




  1990년 그는, 괴물의 촉수 같은 기이한 형태의 옷을 걸친 채 동경시내를 활보한다. 평소와 다름없이 출퇴근을 하던 동경시민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하지만 놀람의 감정은 곧 호기심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한 아시아 여성의 과감하고 도발적인 움직임에 대한 호기심.

  평범한 일상과 평범한 사고 속에서 살아가던 이들에게 ‘호기심’이라는 새로운 생각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일은 중요하다. 이것이 의식의 확장이자 더 나은 세상으로의 변혁을 이끄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불의 몸짓이 뿌린 호기심은 세상을 바꾸는 작은 씨앗이었다. 호기심으로부터 시민들은 익숙한 것에서 벗어난 지각의 확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호기심의 씨앗을 일구는 일은 이불이 포부를 현실로 만들어내는 방법이었다.






제 작품은 늘 아름다웠어요






  앞선 작품들을 보면 썩 달가운 느낌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심기가 불편해진다. 썩어가는 생선, 나체로 매달린 여인, 얼음에 갇혀버린 인물, 촉수 달린 괴이한 형상. 어찌 달가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이불의 계획이었다. 보는 이의 찡그린 얼굴을 통해 무엇이 옳은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작품은 언제나 아름다웠다고. 

  결국 이불은 세상의 이분법적 사고를 바꾸고자 했다. 아름다움과 추함. 남성과 여성. 정상과 비정상. 그리고 이 모든 이분법적 경계들에 대한 비판의식은, 국제무대에서 그 자신이 직접 한계를 마주하던 경험들 덕분에 생명력을 지니게 되었다. 

차별과 모욕 속에서 그의 언어는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 내 이름 불은 날일 변(日)에 날 출(出)이 합해진, 해 돋을 불(日出)자로 ‘먼동이 터 오는 새벽’을 뜻한다. 어쩌면 우리 아버지는 세계를 향해 비상하기 위해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는 지금의 나를 고대하며 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는지도 모르겠다.

- 신경숙 외 18인, 『땀방울에 비친 그녀들의 이야기』, 한국직업능력개발원, 1999.






Lee Bul | Photo: HYE-RYOUNG MIN




  이불에게는 ‘여전사’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그러나 과연 ‘훌륭한 여전사’로만 평가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이는 그를 특별함 속에 가둘 뿐이다.  

  사실 그가 빛날 수 있던 것은 그의 특별함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포부와, 한계를 예술로 승화시킨 일련의 노력들 덕분이었다. 동양인 여성이라는, 불리하다고 생각됐던 것이 오히려 세상을 바꾸겠다는 처음의 포부를 이룰 도구가 되었다. 그의 핸디캡인 몸을 통해 보는 이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그 호기심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씨앗이 되었다. 

씨앗을 일구는 일로 그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포부를 지켜냈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포부 지키는 게 뭐 그리 어려운가.”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부닥친 한계 앞에서 포부를 감히 떠올리고 지켜낼 자신이 있는가? 자격증을 따려는 다짐이 반복되는 실패로 흔들릴 때. 사업을 성공시키겠다는 계획이 코로나19로 흔들릴 때. 당신의 포부는 꺾이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당당히 고개를 끄덕여보라.

  이불이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은, 당신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을 함축한다. 물론 한계에 이르렀을 때 절망하고 포기하려는 감정이 들 수밖에 없다. 인간이기에. 하지만 과감히 일어나는 것 또한 인간의 힘이다. 오히려 그 한계를 당신의 무기로 장착하길 바란다. 

  무기를 장착한 당신은 이제 지켜낼 것이다.


첫눈을 맞이하여 스치듯 생각난 새해 소망을. 보름달 바라보며 우렁차게 외치던 포부를. 또는 일기장에 조그마하게 적어놓던 귀여운 다짐을 말이다.


그리고 결국 이뤄낼 것이다. 이불처럼.






여전히 세상을 바꾸고 싶지만,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태도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 설사 세상이 더 좋아졌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해도,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은 계속 이루어져야 하고, 노력이 실패하고 좌절한다면 그 실패와 좌절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 작가 이불 인터뷰 中






*이불 개인전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월부터 4월까지 열릴 예정이다.
 (<이불 : 시작>, 2021.02.02.-2021.04.18.,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참고문헌

강태희, “How Do You Wear Your Body?: 이불의 몸 짓기”, 『미술 속의 여성: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 미술』,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3, 220쪽
신경숙 외 18인, 『땀방울에 비친 그녀들의 이야기』, 한국직업능력개발원, 1999.
서울신문, “설치작가 이불, 5월27일까지 日모리미술관 개인전”,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206018005, 2012.02.06. 







글 | 김은강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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