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포스팅에는 영화 '파이트 클럽'에 대한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취미는 타인과의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 책을 읽든 영화를 보든, 과거 우린 원초적 행위를 시도하고 영위하는 것에 초점을 뒀다. 하지만 경쟁이 하나의 신념이 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영위에 안주함은 곧 경쟁 사회에서 ‘실패자’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조성한다. 남들보다 특별한 것을 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뒤처질 것이라는 강박관념. 나의 특별한 행위에 타인은 반드시 반응해 ‘좋아요’를 눌러야만 한다. 반대로 사람들의 반응이 내 기대와 달리 저조하고 ‘좋아요’ 수가 적다면 이런 불안감이 들기도 한다.
“내가 뭘 잘못했나?”
이번 2월호의 주제는 ‘약속’이다. 보통 약속을 떠올리면 ‘반드시 어겨서는 안 될’, ‘누구나 그에 응당 따르는’ 것처럼 여긴다. 물론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동물 학대를 해선 안 된다' 등 사회의 건설적인 공동체를 위한 많은 암묵적, 공식적 ‘약속’은 따라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사회의 모든 약속이 꼭 건설적일까, 그렇지 않다면 꼭 지켜야만 할까? 만약 ‘좋아요’ 개수가 당신 ‘개성’의 정당성을 판별하는 약속이라면 그것은 옳은가? 만약 타인보다 우월하지 않다면 실패한 인생이라 치부되는 이분법적인 약속을 따라야 하는가?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영화 ‘파이트 클럽’(1999)을 통해 통제와 안정에 중독된 사회를 비판함과 동시에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물음과 답을 제시했다. 강산이 2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지만, 영화 ‘파이트 클럽’의 시대를 향한 날선 비판과 해답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과연 우린 이런 사회의 약속을 묵묵히 지켜야만 할까? 영화 ‘파이트 클럽’ 속 인물들을 통해 알아보자.
* 영화 인물들의 속성과 행위를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비교하므로 수월한 이해를 위해 영화를 사전에 시청하는 걸 추천한다.
‘잭’(에드워드 노튼)은 심각한 불면증으로 고생했다. 하지만 여러 환자 모임을 통해 치유한다. 단순히 그가 모임에서 자신의 걱정과 근심을 털 수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잭은 모임을 통해 2가지의 상반된 비교우위를 선점해 일종의 쾌락과 안정감을 갖는다.
1. 잭은 가장 아프지 않음으로써 모임 속 환자들보다 비교우위를 선점한다.
우울증을 처방해달라고 의사에게 부탁하지만, 의사는 ‘환자 모임’을 언급하며 당신보다 더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잭’은 여러 암 환자 모임을 참여하면서, 다른 환자들보다 우월한 신체적 건강을 통해 암묵적으로 비교 우위를 선점하게 된다.
2. 잭은 가장 아픔으로써 모임 속 환자들보다 비교우위를 선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장 아픈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비교우위를 선점한다.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모임에서 말을 하지 않으면 가장 아픈 것처럼 보이고,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주목을 받을 수 있다’. 잭’은 의도적 암묵을 취하면서 모임 참여자 누구보다도 고통에서 우위를 선점했고, 이를 통한 일종의 안정감을 갖는다.
이러한 비교우위를 선점함으로써 ‘잭’은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불면증에서 해방된다.
그런데 말라가 등장한다. 정신적 안정을 위해 모임에 참석하는 ‘잭’과 달리, 무료 음식, 커피 등 신체적 안정을 위해 모임에 참석하는 말라. 의도는 다를지언정 ‘안정’이라는 목적으로 ‘잭’과 ‘말라’는 동일 선상에 위치한다. 이러한 동일 선상은 그동안 구축해왔던 ‘잭’의 방식에 균열을 일으킨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고 했던가. ‘잭’은 ‘말라’에게 ‘나와 같은 가짜가 있으면 울기 어렵다’고 말하며 시간대를 나누자고 제안한다. 단지 ‘말라’라는 한 사람이 추가되었을 뿐인데, 왜 ‘잭’의 불면증이 다시 도진 걸까?
‘잭’은 환자들 사이에서 비교우위를 선점하며 일종의 ‘안정감’을 획득했다. 하지만 ‘말라’는 그런 우위를 선점함에 있어 ‘애매함’을 남긴다. ‘잭’이 ‘말라’보다 떨어지진 않지만 그렇다고 뛰어나지 않는 모호함. 즉, 모임에서 ‘잭’은 가장 건강한 존재도, 가장 아픈 존재도 아니게 된다. 이러한 동일선상은 비교우위를 선점하려는 ‘잭’의 의도를 철저히 무시하면서 ‘잭’이 고수해왔던 세계에 큰 균열을 일으킨다.
그렇게 ‘잭’에게 또다시 찾아온 불면증. 그러던 중 그는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을 만나게 된다.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것들 외에 TV 속 비싼 차, 넓은 집, 좋은 옷 등 사치를 병적으로 추구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타일러’. 그는 계속해서 ‘잭’에게 타인에 의한 통제된, 안정에 안주하는 삶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하며 둘은 소위 ‘파이트 클럽’을 결성한다.
에드워드 노튼이 연기한 ‘잭’은 사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타일러’와 같은 인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잭’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에드워드 노튼)의 진짜 이름은 ‘타일러 더든’이라는 사실. 결국 ‘타일러’(에드워드 노튼)가 보았던 ‘타일러’(브래드 피트)는 ‘타일러’ 내면 무의식이 외부로 형상화된 또 다른 자아였다. ‘타일러’는 ‘타일러’에게 전혀 새로운 사실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 단지 불쾌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망각했을 뿐, 상품의 소비와 타인과의 비교우위를 통한 쾌락은 일시적이고 허상뿐임을 ‘타일러’는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 병적으로 이케아의 신상 가구에 집착하고 환자 모임에 나가는 모든 행위. 이는 자기 위로 내지는 자기 개발이란 명목하에 타인을 향한 비교우위를 선점하려는 변명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변명과 불면증에서 영원히 도망칠 수 없는 걸까?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영화 중반과 결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2가지 해답을 제시한다.
1) ‘타일러’로서 마주하는 ‘말라’
위에서 ‘잭’의 비교우위에 균열을 냈던 ‘말라’. 재밌는 사실은 ‘말라’라는 캐릭터는 실제 성경 속에서 아픔, 병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영화 장면 중 ‘타일러’(브래드 피트)와 관계를 가진 ‘말라’를 의식적으로 피하고 내보내려는 ‘잭’. 이는 무의식 중에 ‘말라’라는 아픔, 즉 비교우위를 통해 성취한 쾌락은 결국 허상에 불과함을 인지했으면서도 이성적으로 억압하고 회피하려는 태도를 나타낸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 결국 그는 이제껏 자신과 동일 선상에 위치한 ‘말라’를 피하는 것이 아닌,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진정한 자유를 성취한다.
2) 파이트 클럽
파이트 클럽의 제1원칙과 제2원칙 모두 타인에게 클럽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파이트 클럽의 최종 목적에 기인한다. 파이트 클럽에서 ‘타인’에 크게 중요한 의의를 두지 않는다. ‘타인’이란 존재는 단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본능, 삶의 의미와 이해를 촉발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파이트 클럽은 타인과 싸워 이겼다고 해서 보상을 주지도 갈채를 보내지도 않는다. 결국 클럽에서 싸워서 이겨야 할 상대는 ‘타인’이 아니었다. 무분별한 소비문화로 점철된, 타인과 비교하며 삶을 구속하는 ‘자신’이었고 이를 통해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적이었다.
영화 ‘파이트 클럽’은 우리 스스로 타인과 비교를 통한 쾌락이 허상임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이를 묵시하고 강박적으로 살아가는 현 사회와 대중을 비판했다. 우리에게 더는 이케아 신상 가구를 살 필요도, 환자 모임에도 갈 필요도 없다. 타인의 눈치를 보며 나의 행위를 인정받고 평가받을 의무 또한 없다. 나의 개성은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이다. 약속된 것이라며 당신을 가늠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사회의 약속. 지켜야 할 의무도, 법도 없다.
글 | 이성도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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