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포스팅에는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에 대한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해의 시작인 1월, 한 분기의 시작인 3월 사이에 위치한 달. 2월은 나태하기 쉬운 달이다. 그래서 더더욱 약속에의 나태, 의무에의 나태를 말해야 할 시기이다. 어쩌면 불과 한 달 전에 세운 자신과의 약속조차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 하나쯤이면 괜찮겠지’, ‘이번 한 번이라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이 의지를 흐리게 할 때,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보자.
미세한 균열을 찾아
빈민가 출신인 이 이민자 소년은 친아버지를 찔러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상황은 이미 소년의 범죄를 확신하는 분위기로, 사형선고가 내려지기 직전이다. 이제 배심원 열두 명의 결정만이 남았으며, 만장일치로 유죄가 나온다면 소년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다.
배심원 회의실의 분위기도 재판정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대다수의 배심원들은 소년의 유죄를 확신하며, 어서 결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여유롭게 시행된 거수투표의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이미 확정된 듯 보이는 분위기를 깨고 홀로 무죄를 외친 사람은 바로 배심원 8번이다. 나머지 배심원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그는 증거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말하며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머지 배심원들의 원망스러운 시선에도 그는 증거의 모든 요소를 하나하나 짚어 나간다.
그저 객기인 것처럼 보이던 배심원 8번의 행동은 상황을 의외의 국면으로 전개시킨다. 그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미세한 균열을 통해 새어나가던 물은 곧 둑이 터질 듯 쏟아져 나온다. 배심원 8번이 증거의 오류를 분석하기 시작하자, 이에 감화된 다른 배심원들로부터 또 다른 합리적 의심들이 튀어나온다. 투표를 시행할 때마다 한 명씩 무죄로 마음을 돌리고, 종국에는 무죄가 더 우세한 상황이 된다.
의무, 그리고 나태
이 영화를 '의무'에 대한 관점으로 바라보았을 때, 우리가 주목할 사람은 배심원 10번, 7번, 3번이다. 이 세 명의 배심원은 객관적 추론도 합리적 의심도 없는 '완전한 나태'를 보여준다.
전세가 분리해지자, 배심원 10번은 ‘그 소년 같은 족속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천성이 그렇다’며 분개한다. 그는 결국 자신의 편협하고 추한 고정관념 때문에 유죄를 주장했음을 자신의 입으로 드러낸다. 그의 발언에 질린 나머지 배심원들이 그를 무시하자, 그는 결국 무죄를 인정한다.
배심원 7번은 처음에는 야구 경기를 보러 가야 한다며 남들을 따라 유죄를 선택했다가, 상황이 길어지자 지긋지긋하다며 무죄로 마음을 바꾼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그냥 유죄가 아닐 것 같아서’라 답한다. 그는 어떤 중대한 사안에 대해, 자기만의 근거조차 세우지 못한 채 다수의 의견에 편승하는 인간의 전형이다.
여기까지 오자 무죄는 11명이 된다. 처음과 완벽하게 반대가 된 마지막 상황에서 끈질기게 유죄를 고수하는 사람은 배심원 3번이다. 그는 이전에 아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게 굴었으며, 아들은 2년 전 그와 크게 싸운 후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수세에 몰리자 그는 절대로 입장을 굽히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난동을 피우던 배심원 3번의 지갑에서 아들의 사진이 떨어진다. 잠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매정한 놈”이라며 사진을 찢는다. 울음을 터뜨리며, 결국 배심원 3번도 무죄를 인정한다.
그는 처음에는 증거를 토대로 유죄를 주장하는 듯 굴었지만, 사실은 이민자 소년에게서 자신의 아들을 보고 있었으며, 아들에 대한 원망을 판결에 반영했던 것이다.
이렇게 11:1이었던 상황은 0:12로 바뀌고 배심원단의 결정이 확정된다. 소년은 사형당하지 않을 것이며, 배심원단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약속 – 지켜지기 어려운, 깨지기 쉬운
이 영화에서 배심원들은 주로 숫자로 불린다. 영화의 무대인 ‘배심원 회의실’은 배경과 출신, 이름 등 여러 사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오직 공정성과 객관성을 추구해야 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유무죄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배심원들의 ‘가장 사적인 정보’가 속속들이 밝혀진다는 점이다. 관객들은 그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편견이나 가정사 등을 알게 되고, 몇몇 배심원들이 이 ‘가장 사적인 정보’에 휘둘려 자신의 입장을 결정했다는 사실 또한 깨닫는다.
배심원 8번이 일면식도 없는 소년의 무죄를 두고 고군분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알량한 동정심이나 영웅심리, 혹은 명석함의 과시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답은 그중 무엇도 아니다. 그가 입장을 고수한 이유는 그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배심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신중하고 객관적이며 또 공정해야 한다’는 의무이다. 이는 배심원들이 법정에게 맺은 약속이고, 배심원 제도에 맺은 약속이며, 나아가 민주 사회에 맺은 약속이다.
한 약속이 사적이든 공적이든, 한 개인에게는 ‘지키나 마나 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처럼 ‘오직 개인의 내면에서만 작용하는 약속’은 더더욱 그렇다. 많은 사람들은 갖은 핑계로 약속을 외면한다. 단지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 귀찮아서, 혹은 그저 악의를 품고.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그 약속에 어떤 근본적 가치들이 결부되어 있으며, 이에 나태할 경우 어떠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배심원 8번이 어쩌면 억울하게 사형당했을 한 소년의 생명을 구했듯이, 그렇게 민주 사회의 정의를 수호했듯이 말이다.
삶을 살아가며, 우리는 종종 이 ‘배심원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어떤 의무, 어떤 가치를 수호해야 할 무거운 책임이 있지만, 조금 게으르더라도 남들이 모를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명철함이 흐려지고 의지가 느슨해지려 할 때,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되씹어 보자.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킬 때, 그 결과는 내면에 쌓여 더 큰 무언가를 이루는 발판이 될 것이다.
당장 타인이 알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내면은 진실을 알고 있다.
당장은 티가 나지 않더라도 후에 찾아올 결과는 진실을 보여준다.
나태할 것인가, 충실할 것인가?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글 | 강운지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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