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우리가 공식처럼 외우고 있는 내용이다. 오묘한 녹색이 아름다운 청자와 눈처럼 하얀 백자는 우리 선조의 수준 높은 공예 실력은 물론 각각 고귀한 고려와 조선 왕실의 아취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청자와 백자 사이에는 어떤 도자기가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조선은 백자의 나라로 거듭나게 되었을까?
그 답은 ‘분청사기’에 있다. 분청사기는 청자와 동일한 흙으로 만들어 본래 자기의 색은 회색빛을 띠나 그 위에 하얗게 색을 입혀 만들어낸 그릇으로 조선 건국 초기 왕실에서 사용되었다. 짐작하겠지만, 이 분청사기로부터 한반도의 도자기는 푸른색을 벗고 조선백자로 발전한 것이다. 그런데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고려에서 만들던 아름다운 청자에 비해 분청사기는 어딘가 엉성하고, 만듦새도 어색하다. 이를 청자 대신 왕실에서 사용했다고 하니, 믿기 어려울 지경이다.
‘분청사기’가 이러한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지게 된 연유는 고려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고려 말, 원의 간섭이 심해지며 국력이 쇠퇴하자 도자기 사업도 함께 쇠퇴한다.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당연히 청자를 생산하는 일은 사치로 여겨졌다. 고려의 청자가 완벽할 수 있었던 까닭은 디자인에서부터 제작까지 왕실이 꼼꼼하게 관여했기 때문이다. 왕실이 힘을 잃자 나라를 위해 일하던 도자기 장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 지방에 정착해 자신들만의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렇게 분청은 실패한 고려, 그리고 쇠퇴한 청자문화의 산물로서 시작하였다.
도자기 장인들은 이 무렵부터 왕실의 간섭 없이 자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도자기에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은 도자기의 표면에 붓으로 과감하게 그림을 그려 장식하기도 하고, 마치 도장을 찍듯 무늬를 만들기도 하며 다양한 모양의 ‘분청사기’를 제작한다. 또 장인들이 지방마다 자리 잡으니, 각 지역의 사람들의 선호를 반영한 분청사기 역시 등장한다. 왕실의 기호가 적게 반영되었기에 분청사기에는 민화와 같이 해학적인 장식들도 많이 나타난다. 또 주로 왕실이 주도했던 중국으로부터의 자기 기술 수입이 어려워졌기에 분청사기는 그 뿌리부터 한반도의 기술력과 문화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유분방함의 상징인 분청사기가 어떻게 조선의 ‘왕실’ 자기가 되었을까? 조선은 고려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 고려청자가 화려함과 소수를 위한 사치를 상징했다면, 조선은 이와 완전히 다른 ‘국가대표 그릇’을 필요로 했다. 분청사기는 화려하기보다는 실용적이었고, 그 장식 역시 서민적이었다. 이는 조선이 가진 ‘성리학적 이상’에도 부합하여 분청사기는 자연히 조선 왕실의 사랑을 받게 된다. 이렇게 조선 초기의 왕실 그릇으로 쓰인 분청사기는 우리 역사상 그 어떤 왕실 자기보다 자유롭고 개성 넘친다.
그리고 시간에 따라 분청사기의 하얗게 장식한 부분을 점차 넓혀가며 결국에는 완전한 백색의 자기인 조선백자가 등장한다. 청자에서 백자로의 전환은 분청사기의 등장이 없었더라면 어려웠을 것이다. 분청사기는 역사의 한 켠에 남아 청자, 백자의 고고함과 기품 이외에 과거 우리 민족이 가졌던 ‘자유로움 그리고 즐거움’의 가치를 전해준다.
분청사기 시작은 고려청자의 실패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누가 분청사기를 보고 ‘우리 문화의 실패작’이라고 부를까? 그 실패는 더 발전한 조선을 위한 도약이 되었고, ‘절제와 한’을 넘어선 우리 민족의 또 다른 정서를 기록했다. 그 시작이 비록 실패였을지라도, 분청사기는 결국 또 다른 문화적 성공이 되었다.
역사 속에서 어떠한 사조, 문화의 실패가 결국 새로운 시대의 발판이 되는 흐름은 흔한 서사다. 한 왕조의 실패가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낳고, 한 작가의 죽음이 또 다른 작가의 시대를 열어준다. 결국 분청의 역사가 말해주듯 시행착오의 과정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더 찬란한 미래를 위한 도약이 된다. 우리가 겪어가고 있는 힘든 시간들은 결코 ‘실패’가 아니다. 상상해보자, 지금의 어려움이 우리를 어떠한 새로운 세계로 데리고 갈지.
글 | 이서연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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