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 위의 알록달록한 보따리. 그리고 자신도 보따리인 양 그 위에 앉아있는 한 여인. 이 여인이 바로 김수자다.
위 작품은 김수자가 그의 서사를 마주하는 과정을 담은 비디오 작업이다. 어린 시절 군인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 옮겨 다녔던 삶의 흔적들을 되짚으며, 그 안에서 추억과 성장의 시간들을 마주했다. 그는 체험의 과정 속에서 절대 한자리에 정착하지 않는다. 그저 떠도는 유목민처럼 대지 위에 흔적을 찍어내며 이리저리 나아갈 뿐.
그리고 이러한 서사를 함께한 동반자는 ‘보따리’였다. 옛 피난 시절의 어렴풋한 이미지 속에서나 찾아볼법한 보따리.
다소 갑작스레 등장한 세 글자지만, 지금부터 당신의 뇌리에 꽤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우리네 삶이 보따리와 닮아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보따리는 본디 ‘보자기에 물건을 싸서 꾸린 뭉치’라는 뜻을 지닌다. 여기서 말하는 ‘물건’은 말 그대로 물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의 감정이 될 수도 있다. 웃음보따리, 울음보따리라고 흔히들 얘기하지 않는가.
김수자의 인생은 보따리에 물건을 채워 넣는 과정이었다. 그의 추억과 감각 등을 아우른 인생 전체를 채워 넣었다. 손에 보따리 매듭을 꼬옥 움켜쥐고 있으면 마치 어디론가 바삐 떠나야 할 것 같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아니, 그의 두 눈빛엔 목적지가 없다. 출발은 했지만 그에게 도착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그의 도약은 마침표 없는 도약이었다.
김수자는 ‘바늘여인’으로 통한다. 이는 바로 그의 대표작 때문이다.
위의 비디오 작품 속 등을 보이고 있는 여인이 바로 김수자다.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한사코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작품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스스로를 ‘바늘여인’이라 칭했다. 그는 왜 바늘여인이 되기를 자처한 걸까.
온 감각을 동원하여 이 작품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코끝을 찌르는 사람 냄새. 행인들의 발걸음 소리, 앞길을 내라는 자전거의 따르릉 소리. 낯선 공기가 자극하는 살결의 촉감.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온몸을 내맡긴 한 여인.
여인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삶의 내음이었다.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흘러가는 삶 속 본연의 모습을 마주하며 일종의 ‘명상’의 과정을 지냈다. 암묵적인 잣대로 정해지는 목적지에서 벗어나, 주변의 감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되짚어나갔다.
자신의 보따리를 자신의 감각들로 채워나가는 과정 속에서 오로지 본연의 모습으로 김수자는 도약했다.
도약의 과정을 거듭할수록 바늘여인이 만드는 보따리는 더욱 단단해졌다.
앞서 언급한 <떠도는 도시들-2727 킬로미터 보따리 트럭>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보따리 트럭에 앉아 옛 기억과 재회하는 매 순간들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감각들을 몸으로 흡수했을 것이다. 덧없이 지나간 세월을 느끼며 그 본연의 모습을 마주했을 것이다.
트럭 여행으로 얻은 가시적인 결과물은 없었지만, 삶을 곱씹는 과정을 통해 그 이상의 것을 김수자는 얻었다.
바로, 인생의 진정한 의미. 시간이 오래 걸릴지언정 찾아 마땅한 진정한 자신. 그리고 그로써 얻은 작지만 강한 도약들.
위의 두 작품 모두 목적지의 부재 속에서 주변의 감각들로부터 진정한 본연을 마주 해나가는 과정을 담아낸다.
이러한 과정이 그의 도약에서 마침표가 필요하지 않았던 이유 아니었을까.
1983년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이불보를 꿰매다 이불보에 바늘이 꽂히는 순간 우주적 에너지가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을 느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목적지만을 향해 달려간다. 막상 그 목적지에 이르면 다른 목적지를 찾아 떠날 것을.
마침표를 찍기 위한 도약은 서글프다. 주변의 속삭임에 귀 열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 하나가, 아침 햇살에 바스러지는 물방울 하나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인생(人生)은 곧 인간의 생애 전부인데, 어찌 마침표만 중요하겠는가.
그 마침표를 찍기 위한 수많은 과정과 도약이 결국 한 인간과 인생을 만든다.
그리고 김수자는 보따리 작업을 통해 보여준다. 우리의 인생 또한 바느질의 과정이자 보따리의 삶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어릴 적 바느질을 통해 놀랄 만큼의 큰 울림과 전율을 체험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바느질 자체가 주는 힘 때문이 아니라 그 울림에 귀를 열고 있었던 김수자이기에 가능했다.
김수자가 바늘여인이었듯 우리 또한 하나의 바늘이 되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각자의 몸짓은 바느질이라는 행위를 창조하고, 그 행위는 보따리를 만들어낸다.
결국 나만의 바늘로 나만의 보따리를 만드는 과정 속에 있는 우리. 각자의 힘으로 재료를 선별하여 준비를 하고 힘겹게 바느질을 배워나간다. 바늘에 찔려도 보고 실에 엉켜도 보는 힘든 과정을 끝마치고 나서는 각자의 물건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만만찮은 과정들을 지나 용케 보따리를 만들어낸다.
물론 속도엔 차이가 있는 법. 느린 손 탓에 보따리를 품에 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의 내음을 맡으며 비로소 인생과 자신을 알아갔던 김수자처럼, 그 오랜 과정이 결국은 값지다. 넘어졌던 기억과 설움을 보따리 속에 알차게 채워 넣는 과정이고, 수많은 시도와 도약으로 성장하며 온전한 ‘나’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로써 보따리는 더욱 단단해진다.
그러니 부디, 마침표를 찍기 위해 스스로를 혹사시키지 않길 바란다. 보따리를 아직 다 짓지 못했다면 잠시 힘을 비축하여 다시 도약하면 되고, 헐거운 보따리라면 새롭게 도약하여 더 단단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끝내 보따리를 완성하지 못해도 괜찮다. 완성하려 하지 않아도 좋다.
바늘을 쥐고 있는 이는 바로 당신.
당신의 바늘로 보따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모두 의미 있는 도약이다.
지금도 열심히 바느질을 하며 끊임없는 도약을 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해주고 싶다.
그 수많은 도약의 과정들이 결국은 당신이자, 인생이자, 그 자체로 거대한 마침표라고.
그리고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는 당신이라고.
“인도에 가서 작업할 때,
제 이름 ‘수자’가 인도어로 ‘바늘’이라는 뜻이라고 들었어요. 충격적이었죠.
너무 신기하죠?”
- 김수자, 네이버캐스트
글 | 김은강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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