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윤희에게'
담배 연기는 참으로 매캐하다. 비흡연자로선 많은 부분에서 이해하기 힘든 물건이다. 값이 싼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건강에 좋은 것도 아니다. 사회적 인식이 그리 좋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이해가 될 것도 같다. 바쁘고 거친 하루에 온몸을 맡길 때, 잠시나마 ‘나’를 돌아보며 숨을 돌릴 수 있는 ‘잠깐의 여유’.
영화 ‘윤희에게’ 속 윤희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뿜어내는 자욱한 담배 연기는 이처럼 잠깐의 공백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공백이라는 찰나의 시간 속에서 감독은 등장인물 간의 관계에 대한 환기를 불어넣는다. 서로가 서로를 그리고 자신 스스로를 어떻게 사랑하고 상처를 주었는지 반추해보는 과정. 영화의 호흡은 이런 반추의 과정을 통해 성장해가는 윤희와 등장인물들을 조용히 타들어가는 담배처럼 천천히 뒤따라간다.
‘그래, 기다리지 마’
우연히 ‘윤희’의 첫사랑 ‘쥰’의 편지가 ‘윤희’ 집으로 도착한다. ‘윤희’의 딸 ‘새봄’은 이를 보고 단순한 친구의 편지가 아님을 눈치채고 윤희에게 ‘쥰’이 있는 일본 ‘오타루’로 여행을 제안한다. 이에 ‘윤희’는 직장 상사인 조리사를 찾아가 휴가를 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리사는 휴가를 낸다는 윤희에게 과감히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답한다. 이에 윤희는 무언가 결심한 듯 “그래, 기다리지 마”라는 말과 함께 직장을 뛰쳐나온다.
영화 ‘윤희에게’는 윤희와 그의 주변 인물 간의 관계를 되짚어보며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고 더 큰 도약을 하기 위한 과정을 담담히 보여준다. 재밌는 것은 윤희와 주변 인물 간의 결정적인 관계의 환기, 성장이 있을 때마다 한 가지 특별한 행위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담배’. 영화는 유독 ‘담배’와 관련한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접하는 ‘마초적’인 장면을 강조하며 단순히 흡연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피상적 의미로 소비하지 않는다. ‘흡연’이라는 행위 자체보단, 흡연을 통해 생기는 잠깐의 ‘공백’, ‘여유’에서 일어나는 인물의 사고(思考)의 변화에 주목한다.
“근데 엄마 담배 피워?" “나도 가끔”
…
“넌 누굴 닮았니?” “삼촌이 엄마 닮았대”
일본 오타루로 도착한 윤희와 새봄. 윤희는 미성년자인 새봄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하며 동시에 자기도 흡연가임을 고백한다. 영화 초반 내내 서로 간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던 윤희와 새봄.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일본 여행에서 서로가 같은 흡연가라는 사실에 동질감을 느끼게 되며 한층 가까워진다.
"너 담배 피울 때 같이 피면 좋잖아”
‘새봄’을 위해 그들의 여행에 몰래 따라온 새봄의 남자친구 ‘경수’. 자유시간을 가진 ‘새봄’과 둘만의 비밀 데이트를 즐긴다. 그러던 중 경수는 필 줄도 모르는 담배를 피우려다 새봄에게 들키고 만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단지 ‘새봄’이 담배 피울 때 같이 있고 싶었을 뿐이었다.
여행 중 각자 자유시간을 가지게 된 윤희와 새봄. 윤희는 한 호텔 바로 향한다. 그곳에서 윤희는 담배를 피우며 말이 통하지 않는 바텐더에게 처음으로 ‘쥰’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놓는다.
“모처럼 만나서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산책도 하고 집에 놀러도 가보고 그랬어요”
혈연, 지연, 학연 그리고 흡연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담배는 관계 간의 동질감을 불러일으킨다. 삼삼오오 가까이 모여 피우는 담배의 속성. 지루하고 힘든 시간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얼어붙은 서로 간의 관계를 따뜻하게 데우는 찰나의 시간.
이렇게 영화 속 ‘담배’의 역할은 단순히 피기 위해 존재하는 물체가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을 혹은 본인과 타인 간의 관계를 정리해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담배’가 꼭 관계의 진전이란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정리’라는 용어의 속성엔 ‘버림’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쥰’과 ‘인호’에게 담배는 관계를 버리기 위해,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쥰은 일본에서 사는 거 힘들지 않아?”
…
“글쎄, 일본에서 산 지 20년도 넘었는데 뭘”
쥰은 담배를 빌려 진심을 숨긴다. ‘윤희’에게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쓰고 그녀의 꿈을 꾸면서도 ‘쥰’은 끝끝내 한국이 그립지 않다고 한다.
“료코씨도 여태까지 숨기고 살아온 게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숨기고 살아요”
작 중 ‘료코’가 결국 ‘쥰’을 사랑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료코’가 ‘쥰’을 친구 이상으로 좋아했고 ‘쥰’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았다고 유추할 수는 있다. 하지만 ‘쥰’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계속 숨기라고 말한다. 이에 여러 가지 해석을 할 수 있다.
1) ‘쥰’이 과거 ‘윤희’를 사랑했다가 사회의 시선에 상처를 받았던 경험이 있어 ‘료코’의 그런 마음에 대한 경고한 것이다.
2) ‘쥰’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료코’가 알아차릴까 회피한 것이다.
3) ‘쥰’의 ‘윤희’를 향한 마음이 아직도 너무 커서 거절한 것이다.
어떠한 답이 맞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 외에도 다양한 해석이 얼마든지 있을 거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쥰’은 ‘료코’와 ‘윤희’와의 관계를 애써 잊으려 했다는 사실이다.
“아빠 요즘에 담배 끊었거든”
…
“너네 엄마는 사람을 좀 외롭게 하는 사람이야”
인호에게 담배는 윤희와 관계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인호와 윤희가 결혼한 이유는 서로가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흐름에 따라 흘러갔을 뿐이었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것이 사회의 섭리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서로 함께 있어도 고통스러웠고 외로웠다. 그리고 둘은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어느 날, 인호는 새봄에게 담배를 끊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호는 자신을 사랑하는, 서로가 더는 외로움을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사랑,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인호에게 더는 외로움을 회피하기 위해, 윤희와 그랬던 것처럼 서로 간의 관계를 회피하기 위해 담배를 피울 필요가 없어졌다.
이렇게 영화 ‘윤희에게’에서 ‘담배’는 다양한 의미를 표현한다. 자신을 솔직히 마주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하고 서로 간의 관계를 진전, 회복시키는 시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반대로 서로 간의 관계를 회피하기 위한 변명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여러 가지 역할에도 영화 속 담배는 스스로 혹은 타인 간의 ‘관계의 정리’라는 하나의 의미로 귀결된다.
결국 윤희는 쥰과 재회하면서 과거의 아픈 기억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억압했던 친오빠에게 이별을 고하며 새봄과 함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서울로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윤희와 주변 인물들은 ‘담배’라는 매개체를 계기로 본인 혹은 타인 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리하고 도약을 펼칠 준비를 마친다.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담배를 권장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서 담배는 단지 관계를 반추해보는 시간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 계기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 속 인물들이 ‘담배’라는 매개체를 통해 스스로를 혹은 타인 간의 관계를 솔직히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굳이 담배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당신의 삶을 솔직하게 되돌아보고 정리할 시간을 제공할 공백은 무엇인가? 이런 공백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다, 단지 더 큰 도약을 위한 1보 후퇴이니 말이다.
글 | 이성도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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