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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Apr 28. 2021

개츠비는 왜 '위대'했을까? | '위대한 개츠비'




  자연이 만개하는 계절, 4월의 봄. 모든 것이 생명을 얻고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그런 계절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개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젊음의 절정? 성공의 절정? 사랑의 절정? 글쎄. 죽음 이후의 순간은 어떨까?

  만개는 활짝 피어나는 순간,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모아 그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이상향을 꿈꾸며 나아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잘 걸러진, 스스로의 이상에 가까운 모습만을 필터링해 보여주기 쉽다. 살아 있을 땐 남의 눈을 속이기가 참 쉽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살아있을 때 우리는 만개하지 못한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그 가짜 모습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은 한순간이다. 우리가 남긴 삶의 흔적들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기에, 심연 깊숙이 숨겨왔던 것들이 낱낱이 뭍으로 끌어 올려진다. 그러니 한 인간의 모든 민낯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죽음 이후야말로 인간이 진정으로 만개하는 순간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기에 죽음 이후에 만개한 꽃이 그 빛을 발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아주 특별한 이가 있다. 높이 날아 태양에 가까워지려다 추락한 이카루스가 아닌, 그 태양을 품에 안는 데 성공한 사람. 죽음으로써 자신의 완벽한 이상향으로 피어난 사람. 바로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소설 속 주인공,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







단순한 치정 소설? 아니면 성공신화?


©영화 '위대한 개츠비'




  줄거리는 간단하다. 개츠비라는 한 남자가 젊을 적 연인이던 데이지와 경제적 신분 차이로 맺어지지 못하고, 후에 톰이라는 남자와 결혼한 그녀를 성공한 모습으로 다시 되찾으려는 이야기. 원작 소설에서는 이를 닉이라는 인물의 시선을 통해서 보여준다. 겉보기엔 그저 흔한 치정 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혼한 데이지는 개츠비를 다시 만나고, 남편인 톰도 머틀이라는 여성과 불륜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위대한 개츠비>라는 이야기가 단순한 로맨스에 불과할까? 물론, 개츠비는 실로 대단한 사랑을 했다. 데이지와의 재회를 위해 막대한 부를 거머 쥐는 데 성공했고, 데이지의 집이 보이는 바로 맞은편에 그의 저택을 세웠다. 또한 거의 매일 밤 성대한 파티를 열며 언젠가는 데이지가 소식을 듣고 찾아오기를 바랐다. 정말 한 평생 한 여인 만을 위해 살아온 것처럼 보이는 이 남자는 로맨스 소설의 그럴듯한 주인공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전에 자신의 성공신화를 꿈꾸던 한 소년이 개츠비라는 인물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개츠비가 그렇게도 성공을 염원한 이유는 비단 사랑하는 연인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는 왜 '위대'한가?

©영화 '위대한 개츠비'




  이 소설의 제목은 ‘위대한’ 개츠비다. 이는 서술자인 닉이 쓰고 있는 소설의 제목으로, 즉 닉이 개츠비에 대해 쓴 소설이 바로 <위대한 개츠비>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닉은 그를 위대하다고 한 것일까?

  그가 거대한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아니면 열렬하게 사랑을 쫓았기 때문일까? 그 이유는 소설이 끝을 맞이한 이후에 알 수 있다. 사실 개츠비는 개츠비가 아니다. 화려한 저택과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그는 사실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의 ‘제임스 개츠’라는 이름의 초라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물을 ‘제이 개츠비’로 설정해놓고, 제임스 개츠에서 제이 개츠비로 탈바꿈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 / ©pinterest




위는 그가 어린 시절 적어놓은 일과표와 다짐이다. 이를 보면 그가 제이 개츠비가 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했는지 알 수 있다. 즉, 데이지를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그는 제이 개츠비라는 인물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철저히 지키며 완벽한 이상향이 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살아남은 잿빛 인간들



©영화 '위대한 개츠비'




  당시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친 미국은 많은 젊은이들이 삶의 목적을 잃고 방황하며 방탕하게 살아갔던 말 그대로 잿빛의 시대였다. 그리고 소설에서 결국엔 살아남은 이들, 데이지와 톰은 이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소설 후반부에 데이지가 차로 치어 죽인 머틀의 살인죄를 개츠비가 뒤집어쓰게 된다. 그 이유로 머틀의 남편이었던 윌슨에 의해 개츠비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는 모두 데이지와 톰이 공모하여 저지른 것이다. 그들은 부유한 상류층이지만 그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불륜을 저질러도 겉으로는 깔끔한 척한다. 별다른 삶의 이유도 없이 살아남아 더더욱 썩어간다.


  이처럼 개츠비는 엄청나게 높은 순도의 사랑으로 데이지라는 태양을 향해 몸부림치다 결국 추락한 듯 보인다. 하지만 앞서 분명 태양을 품에 안는 데 성공했다 말하지 않았던가? 그 이유는 개츠비의 태양은 데이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태양은 자신이 만든 완벽한 이상향 ‘개츠비’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개츠비라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갔다. 그 과정에서 당시 불법이던 밀주업에 손을 대긴 했지만, 아무런 목적도 삶의 기준도 없던 사회에서 그는 분명 달랐다. 당시 사회의 주류이던 기존 상류계층들이 축적된 부와 지위로 방탕하게 살아간 반면, 그는 삶을 짜임새 있게 일궈가며 자신의 이상으로 거듭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또한 믿음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던 시대에 삶의 마지막까지도 데이지를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만이 믿음의 가치를 빛내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그가 꿈꾸던 제이 개츠비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개츠비는 그 회색의 거대한 도시 안에서 유일하게 빛났다. 그것이 닉이 개츠비가 위대하다고 한 이유가 아닐까.


 


 





결국 개츠비는 만개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는 죽었지만 그렇기에 만개했다. 자, 생각해 보자. 그를 제임스 개츠로 기억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는 결국 자신의 이상향이었던 제이 개츠비로 완벽하게 탈바꿈한 것이다. 이는 닉이 이 소설의 제목을 ‘위대한 개츠비’로 남김으로써 완성된다. 닉은 그의 본명을 알고 있음에도 개츠비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읽는 독자에게 그가 개츠비로 인식되도록 만든다. 심지어 사랑했던 연인 데이지조차 그를 개츠비라고 밖에는 알지 못한다.


  결국 그는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삶의 마지막을 그가 바랐던 제이 개츠비라는 이름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모든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 그는 제이 개츠비로 완벽하게 피어났다. 그 또한 자신이 원하는 모습인 ‘개츠비’로서의 모습만을 필터링하여 보여 주었지만, 결국 그 거짓 모습에 다가가려는 무수한 노력 끝에 그것이 진짜 자신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한 편의 소설로 남아 많은 이들에게 개츠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 않은가. 결국 그는 개츠비라는 태양을 품에 안은 것이다.


  우리 또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피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죽음이란 불가피한 삶의 과정이다. 그러니 언젠가의 죽음 뒤에 만개할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며 현재를 충실히 살자고 말하고 싶다. 만개한 모습이 부끄러움으로 남지 않도록 가끔씩 거울을 비춰 보면서 말이다.





글 | 김민경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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