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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Sep 17. 2020

영화 '토탈 이클립스' | 천재 시인 '랭보'를 만나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그러하듯 체육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수업은 문학이었고 그중에서도 나의 관심사는 시였다.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 짧은 단어 하나로 의미하는 바를 표현해 내는 시인들이 멋있었다. 시의 매력에 한참 빠져 있을 때, 나는 읽지는 않아도, 들고 다닐 시집 한 권이 필요했다.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시와 낭만은 함께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 ©네이버



낭만에 심취해 있던 고교생은 시집을 고르기 위해 서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라는 시집을 집어 들었다. 책 속에는 프랑스의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이하, 랭보)의 작품이 빼곡했다. 하지만 낭만을 위해 시집 한 권을 사려는 학생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랭보’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의 삶을 다룬 영화 ‘토탈 이클립스’를 보게 됐다. 랭보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영화 <토탈 이클립스> (1995). 프랑스 천재 시인 '랭보'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폴 베를렌'은 데이비드 슐리스가 연기했다.





랭보가 보낸 견자의 편지


1871년 5월, 랭보는 편지 두 통을 적어 자신의 멘토들에게 보냈다. 랭보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견자의 편지’는 이 편지를 말한다. 편지에는 그의 시론(詩論)과 ‘견자’(見者)가 되겠다고 밝히는 내용이 적혀있다. 랭보는 편지에서 거론했던 견자들과 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그중 한 명인 ‘테오도르 드 방빌’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끝내 답장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랭보는 그의 친구 ‘샤를 브르타뉴’와 시인 ‘폴 베를렌’이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베를렌은 랭보가 진짜 시인으로 생각하는 ‘견자’였다. 랭보는 베를렌에게 4편의 시를 담은 편지를 썼다. 하지만 베를렌은 나흘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고, 이에 랭보는 ‘나의 작은 연인들’, ‘첫 영성체’, ‘민중들이 다시 모여드는 파리’ 등 4편의 시를 담아 한 번 더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9월, 베를렌이 랭보에 부름에 답했다. 
   

랭보와 폴 베를렌의 만남


베를렌에게 답장을 받고 ‘파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랭보’



위대한 영혼이여, 어서 오시오. 우리는 당신을 원하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이다!



랭보의 시에 감탄한 베를렌은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랭보는 그를 만나기 위해 파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두 명의 천재가 만나게 된 이유는 지극히 문학적이며, 예술적인 관심이었다. 베를렌은 랭보가 보낸 단 8개의 주옥같은 시를 보고, 그가 궁금해졌다. 나아가 그와 만나 대화를 하고 교감하기를 원했다. 랭보가 자신의 죽어있는 ‘영감’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랭보 역시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세상에 자신의 시를 소개해 줄 수 있는 베를렌이 필요했다. 결국 이 둘의 만남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즈니스’의 일종이었다.
   

환영받지 못하는 사랑


랭보의 재능을 특별하게 여긴 베를렌은 그에게 많은 것을 제공했다. 시인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모임에 데려가기도 했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술을 가르치듯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술 ‘압셍트’를 맛보여 주기도 했다. 그들은 함께 여행 다니고, 자유롭게 시를 논하고, 글을 썼다. 



알고 보아도, 랭보와 베를렌의 베드신은 충격적이다.



서로에게 너무나 빠져든 탓일까? 랭보와 베를렌은 문학적 교감을 넘어, 서로의 몸을 탐닉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문제는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는 ‘동성애’가 금단의 사랑이었다는 점이다. 베를렌은 랭보의 영혼보다는 몸을 더 사랑했다. 하지만 랭보는 달랐다.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고, 엄격했던 어머니 손에 자란 탓에 애정결핍을 앓고 있었다. 그런 랭보에게 베를렌은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사랑아슬아슬한 줄타기 


랭보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내와의 결혼반지를 끼고 있는 베를렌에게 분노한다.



랭보는 베를렌을 사랑함과 동시에 그의 아내에게 큰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베를렌이 아내(마틸드)와 자신 사이에서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를렌을 조건 없이 사랑한 랭보와 달리 베를렌은 아내와 랭보 둘 다를 원했다. 이러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랭보는 급기야 베를렌의 손바닥을 칼로 찍으며 분노를 표출한다. 
 
속일 수 없는 세 가지. 기침, 가난, 사랑이다. 둘의 사랑은 부인 마틸다의 의심으로 시작돼, 점점 주위로 퍼져나갔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동성애가 도덕적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죄악으로 취급받던 시기였다. 이 둘의 사랑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당장 내일 거품처럼 사라진다 해도 놀랄 것 없는 비극적인 사랑이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참지 못할 일이 없다는 거야 



파국으로 향하는 열차


랭보와 베를렌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런던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들은 마음껏 시를 쓰고 예술을 논했다. 비로소 그들이 행복을 소유한 듯 보였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기고야 만다. 가난이 찾아온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인이라는 직업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아니다. 베를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시인이지만 부자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를렌이 “돈이 거의 떨어졌다”라고 랭보에게 말했다. 그러자 랭보는 “전에도 말했지만 난 일 같은 건 하지 않아, 글이 잘 써지는 이때 돈 버느라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베를렌은 점차 이기적인 랭보에게 지쳐갔다. 그 역시 시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고, 그 역시 일하면서 사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의 뒤에는 뒷바라지 잘해주는 아내와 장인의 도움이 있었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


베를렌이 쏜 총알은 그 자신과 랭보의 삶을 한 순간에 바꿔 놓았다.



1873년 7월 10일, 마침내 둘의 감정이 폭발했다. 랭보는 가난에 찌든 자신의 생활이 싫었다. 시는 예전처럼 쉽게 쓰여 지지 않았고 창작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날도 부쩍 늘었다. 게다가 랭보는 여전히 베를렌이 아내와 자신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것이 싫었다. 결국 랭보는 참지 못하고 베를렌에게 절교를 선언한다. 
   
베를렌 입장에서 보면 그 역시 억울했다.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랭보를 위해 헌신했으나, 그 대가는 온갖 모욕적인 욕과 결별 선언이었다. 베를렌은 참지 못하고 절교를 선언한 랭보에게 총을 쏜다. 베를렌이 쏘아 올린 총알은 랭보의 왼손에 박혔다. 랭보는 절규했고, 베를렌은 술에 취한 상태로 쓰러졌다. 이 총소리는 베를렌을 법정 위에 서게 만들었고, 그는 동성애로 기소되어 2년간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은 이 시기에 쓰여진다.



랭보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되는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쓴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책이 출간됐다. 하지만 프랑스 문단과 독자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 후 랭보는 1874년, 예전에 썼던 <채색 판화집>을 새로 고쳐 쓴다. 그리고 그 작품을 끝으로 랭보는 절필한다. 



천재더 이상 시를 쓰지 않다


세상을 바꾸려 했던 날개 꺾인 ‘천재’



시간이 흐르고 베를렌이 감옥에서 출소 한 후, 둘은 다시 만나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나눈다. 베를렌은 부인에게 이혼 당했고 혼자가 됐으며, 랭보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 “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지?”라고 묻자 이에 랭보는 “난 내가 글을 쓰면 세상이 변할 거라 생각했어, 완전히 달라질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소용없었어 세상은 너무 오래돼서 새로운 것이 없었지, 쓰여 지지 않은 건 없단 말이야”라고 답했다.
   
베를렌은 랭보의 재능이 아까워 설득했다. 하지만 천재는 더 이상 글 쓰는 것에 미련이 없었다.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처음 두 사람이 만날 때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만남은 둘의 마지막 만남이 됐다.



랭보에게 ‘행복’이란 무엇이었을까



그 후 랭보는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았다. 식민지 용병, 채석장 광부, 상인, 탐험가, 무기 판매업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그러다 1891년 무릎 통증을 느꼈고, 결국 다리를 절단한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0일, 전신에 암이 퍼져 세상을 떠났다.
  

달이 해를 가린다


프랑스의 천재 시인 ‘랭보’는 15세부터 20세까지, 불과 5년이라는 짧은 시간만을 ‘시’를 쓰는데 사용했다. 냉정하게 시인으로서 살아간 기간은 길다고 볼 수 없으며, 작품의 숫자도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특별한 ‘시인’으로 기억되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을 가도 이룰 수 없는 것을, 천재의 파란만장한 5년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한 장면을 뽑아야 한다면 이 부분이다.



‘Total Eclipse(토탈 이클립스)’는 ‘개기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개기식은 하나의 천체가 다른 천체에 완전하게 가려지는 현상을 말한다. 랭보와 베를렌 둘 중 누가 태양이고, 누가 달이었을까? 어쩌면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해가 있으면, 달이 있어야 하고, 그 둘은 언젠가 반드시 같은 선상에 놓인다는 것이다. 랭보와 베를렌은 서로에게 필연적인 존재였다.  만약  ‘시’라는 우주에서 '개기식'을 말한다면, 그들이 함께 보낸 2년이 아니었을까?





글ㅣ주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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