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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May 12. 2021

그 천재 음악가는 왜 불행했을까 |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작곡가, 환상적인 동화의 세계를 선율에 구현해 낸 천재 음악가, 19세기 발레 음악의 거장. 평범한 인간이기보다는 전설이나 신화 속 예술가에 더 가까운 듯 보이는 이 남자는, 평생 지독한 우울증을 앓은 한 사람이기도 했다.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섬세하고 내성적이었던 차이콥스키는 언제나 관계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에게 관계는 잡힐 것 같지만 언제나 저 멀리 사라지는 허상과도 같았다. 이 글에서는 차이콥스키의 음악 대신 그의 삶을, 그의 영혼을 가장 매섭게 할퀴고 간 세 가지 관계를 다뤄보려 한다. 세 관계는 ‘상실’, ‘부정’, 그리고 ‘배신’의 형태로 그를 찢고 뒤흔들었다.
 





관계, 상실

차이콥스키의 가족사진. 가장 좌측에 서 있는 아이가 어린 차이콥스키이며, 옆에 어머니 알렉산드라가 앉아있다. | ©Classic FM



 
  어머니인 ‘알렉산드라 알렉세예프나 아시에르’의 죽음은 차이콥스키의 삶에 첫 번째 고통이었으며, 평생에 걸친 상흔을 얻은 사건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차이콥스키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차이콥스키는 광산촌에서 태어난 데다가 그의 가문에는 음악을 전공한 친척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음악적 재능과 열정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추측하곤 한다.

  그녀는 프랑스계 여성이었고, 차이콥스키의 교육을 위해 프랑스 출신 가정교사를 고용했다. 덕분에 차이콥스키는 당시 문화적 중심지였던 프랑스의 문화를 일찍부터 접할 수 있었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동시대의 러시아 작곡가들보다 훨씬 서유럽적 정취를 가졌는데, 이러한 점에서 알렉산드라의 교육이 그의 작품세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음이 추측된다.

  겁 많고 내성적인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차이콥스키 역시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깊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어머니에게서 떨어지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차이콥스키가 열두 살에 불과할 때 콜레라로 사망한다. 차이콥스키가 작곡을 시작한 시점은 그녀의 죽음 직후였다. 이 점에서 차이콥스키에게 작곡은 크나큰 상실로 인해 얻은 슬픔을 배출하는 방법이었을 짐작할 수 있다.
 








관계, 부정




  차이콥스키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의 성 지향성이다. 극도로 보수적이었던 당시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범죄 행위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동성애자였던 그는 당연히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싶어 했고, 따라서 사랑하지 않는 여성과 짧은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


©Tchaikovsky Research




  단 몇 주 만에 헤어진 부인 ‘안토니나 이바노프 밀류코바(안토니나 차이코프스카야)’는 차이콥스키보다 10살가량 어린 제자였다. 차이콥스키를 흠모하던 안토니나는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자살할 것이라고 말하며 열렬히 구애했다.

  스스로에 대한 부정과 외면으로 시작된 결혼생활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파국으로 치달았으며, 사실상 차이콥스키에 대한 사회의 의심을 피하지도 못했다.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자 다시금 세간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불행한 결혼생활로 인해 차이콥스키 자신이 극심한 신경쇠약과 불안증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배우자에게 사랑받지 못한 안토니나 역시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

  그들의 결혼은 완전한 실패였으며, 서로에게 치명적인 관계였다. 차이콥스키는 괴로움에 시달린 끝에 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했고, 이후 요양 차 유럽으로 도피 여행을 떠난다. 안토니나는 후에 정신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관계, 배신



  세 번째 관계의 주인공은, 오랜 시간 차이콥스키의 창작 생활을 지지해 준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이다.’ 둘은 단순한 후원인과 피후원인이 아닌, 막역한 친구이자 정신적 동반자였다.


©wikipedia




  폰 메크 부인은 무려 14년 동안이나 차이콥스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주었다. 그녀가 지원해 준 금액은 매년 6000루블, 러시아 하급 공무원 연봉의 약 10배 정도 되는 거금이었다. 덕분에 차이콥스키는 교수직을 은퇴하고 음악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차이콥스키와 폰 메크 부인은 단 한 번도 서로 얼굴을 마주한 적 없다는 것이다. 둘은 오직 글로 소통하였는데, 그들 사이에 오고 간 1200통의 편지가 그들의 정신적 친밀함을 보여준다. 폰 메크 부인은 자신에게 차이콥스키란 마치 초인(超人)과 같은 존재이기에 환상을 깨고 싶지 않다고 말한 바가 있다. 이러한 면에서 그들의 관계가 예술가와 후원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이상적인 모습이었음을 말해준다.


  차이콥스키는 부인과의 유대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가장 고결해 보이는 관계조차 한순간에 사라지는 법이다. 부인은 1890년 10월, 갑작스럽게 결별을 선언한다. 그녀가 파산했다는 이유였다. 차이콥스키는 당시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1891년부터는 국가 연금을 받았기에 별다른 경제적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그러나 글과 종이로 이어져온 기나긴 우정이 일방적으로 끊어졌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사망 직전 분노에 찬 목소리로 폰 메크 부인의 이름을 외쳤다고 한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으며, 아무리 단단한 마음의 소유자일지라도 세상을 혼자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차이콥스키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많은 경우 상처받는 쪽이었고, 쉽게 부서지는 영혼을 지니고 살았기에 그의 음악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운 삶을 보내지 못했다.


  천재 음악가의 베일을 한 꺼풀 벗기면 드러나는 모습은 그저 ‘이해받고 싶었던 한 사람’이었다. 평생토록 외로웠던 남자는 병상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마지막 힘을 쏟아 만들어낸 걸작 <비창>의 초연 약 일주일 후, 1893년 11월 6일의 일이었다.


 





모든 슬픔에게


  사람이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면 차라리 행복했을까? 인간관계에서 고통받을 때 자주 하는 생각이다. 실패하거나 보답받지 못한 관계에서 자괴감과 비참함을 맛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하리라 믿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우리는 평생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관계는 인간을 구원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망가뜨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우선 관계가 근본적으로 애처로운 기대의 산물이라는 데 있다. 내가 이 정도의 애정을 준다면 저들도 보답해 주겠지, 내가 이만큼 노력한다면 분명 그들도 관심을 기울이겠지, 하는 기대 말이다. 또한 아무리 단단한 관계라도 절대적인 시간과 죽음 앞에서는 끊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관계라는 연약한 허상에 마음 졸이며, 상처받고 절망한다.


  차이콥스키는 따로 유서를 남기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의 마지막 곡 ‘비창’에서 그가 느낀 삶의 고통과 비탄이 격정적인 선율로 승화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차이콥스키는 생전에 너무나도 자주 울어 한 평론가는 그를 ‘눈물 제조기’라 불렀다고 한다. 우리가 ‘비창’을 들으며 눈물짓게 되는 이유는, 이미 그 곡에 차이콥스키의 슬픔이 가득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리라.


  ‘거장 차이콥스키’, ‘불세출의 천재 음악가’보다는 '우리처럼 외롭고 약했던 한 사람'에게 위로와 경의를 전하고 싶다.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겪는 관계의 고통에 공감하고 탄식하며, 많은 관계들에 상처받으며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비창’을 바친다.



차이코프스키 비창 4악장

https://youtu.be/JsAomNterHU 







글 | 강운지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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