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스뎅 식판에 담긴 밥을 통째로 덜어 국그릇에 버린다. 근방에서 가장 급식이 형편없기로 유명한 사립학교다. 저녁 급식으로 나온 반찬은 무말랭이, 말라비틀어진 고등어구이, 김치로, 밥을 먹지 않으면 턱없이 열량이 부족한 구성이다. 그럼에도아이는 희고 둥글게 쌓인 밥에 손 하나 대지 않은 채로 두다가 그대로 버린다. 이렇게 먹은 지 이미 수개월이 되었다. 정사이즈로 산 교복 블라우스와 치마가 헐렁해지고, 허리를 굽히면 등 쪽 갈비뼈를 육안으로 셀 수 있다. 좀 있으면 허기에 익숙해진 배가 꼬르륵, 신호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먹어서 생길 죄책감보다는 허기가 낫다, 고 아이는 생각하며 허기를 눌러낸다.
매일 습관처럼 올라가는 체중계에 표시된 무게는 점점 낮아져 아침에는 43킬로그램을 기록했다. 이게 내가 원하던 몸무게였던가? 아이는 자문한다. 가끔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헷갈린다. 최근 머리카락이 빠지는 속도가 자라나는 속도를 추월했다. 어릴 때는 친척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풍성했던 머리숱이 이제는 주먹 하나로 쉽게 잡힐 정도로 줄었다. 눈 밑에 검은 그림자는 매일 밤 열한 시까지 하는 야자 때문인지 영양소 부족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도통 없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시작은 운동부족을 갈음하기 위해 식이조절을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아니다. 이야기는 더 앞에서 시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다니던 중학교는 주 3회 70분씩의 체육을 의무로 했고, 수업은 교실과 교실 사이를 이동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학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넓은 학교를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했다. 거기에 갑상선 기능 항진증 치료를 위한 운동치료로 아이는 하교 후 아파트 지하의 러닝머신을 매일 50분에서 90분을 달렸다. 질병이 시작되던 열네 살 때는 400미터 트랙 한 바퀴도 버거워했고, 한창 호르몬 수치가 심할 때는 키 160에 몸무게가 70 킬로그램까지 나가기도 했다. 진단 후 1년 반 동안 매일 학교에서 그리고 집에서 운동한 결과, 아이는 12분 내에 400미터 트랙을 네 바퀴 반에서 다섯 바퀴까지 달릴 수 있었다. 몸무게는54 킬로그램의 적정 수준을 기록했다. 갑상선 수치도 그즈음에는 정상 범위의 최고점을 살짝 웃도는 수준으로 안정화되고 있었다. 10대 때의 시련에 대한 해피엔딩은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그러다 열여섯 살 크리스마스이브에 아빠가 과로로 인한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3년간의 타지 생활을 정리할 경황도 없이 아이는 먼저 동생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한국으로 와야 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괜히 집안일을 걱정할까 봐 일부러 집에서 먼 사립학교로 아이를 입학시켰다. 기숙사가 없는 학교였다. 아이는 3년 간 아침 여섯 시 사십 분에 셔틀버스를 가장 먼저 탔고, 밤 열한 시 사십 분에 가장 나중에 내렸다.
낯선 학교에서의 첫날은 아이에게 문화충격이었다. 보통 학기 첫날은 으레 필통만 들고 가서 한 학기 오리엔테이션만 듣고 오는 것 아니었던가? 아이는 입학식이 끝나면 집에 보내주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가방에 필통과 빈공 책 하나, 그리고 실내화 가방만 챙겨 갔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학교는 첫날부터 밤 열한 시까지 야간'자기 주도'학습을 시켰다. (자율이라는 단어를 교묘하게 자기 주도로 바꿔 학생의 의사 따위는 묻지 않는 매우 야비한 작명이라고, 아이는 생각했다.) 야자시간 시작 전에 아이는 당혹감에 주위를 둘러보다 담임을 찾아갔다. 담임은 해당 학기 영어 독해 교재를 건네주었고, 아이는 맥락 없이 적당한 길이로 잘라댄 영어 지문들을 하나하나 정독하며 시간을 때웠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지만, 그렇게 끔찍하도록 재미없는 텍스트 꾸러미를 이렇게 모아놓기도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학교는 구타와 욕설이 빈번했다. 경기 인권조례로 체벌과 폭언이 불가능하게 된 건 1년 후의 일이었다. 선생들의 농담은 어딘가 비틀려 있었다. 아이가 그것을 "젠더 감수성의 결여, " "인권의식의 결여" 따위의 명칭으로 라벨을 붙여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게 된 건 고등학교 졸업 후 수많은 책을 읽고 나서의 일이다. 당시 아이가 할 수 있는 반응이라곤 체벌 장면을 애써 보지 않거나, 선생들의 이상한 말에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얼른 잊으려고 노력하는 게 전부였다.
1학년 건강검진 때였다. 학생들은 한 줄로 서서 차례대로 몸무게를 쟀다. 아이가 무게를 재고 체중이 적힌 결과지를 들고 나오자 아이들을 감독하던 담임은 아이의 결과지를 뺏어 들고는 "뭐야 너, 50 킬로그램을 넘냐?"하고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관리 좀 하지. 생각보다 많이 나가네. 이러다 훅 간다 너"하고 담임은 킬킬댔다. 그리고 다른 여학생의 몸무게를 지적하러 갔다. 아이가 스물여덟 살이 되었다면 아마 그 말에 오만가지 방법으로 반박을 하고 무안을 준 후 즉시 자퇴를 선언하든 선생을 고발하든 간에 어떻게든 학교를 한바탕 뒤집었겠으나, 열일곱 살의 아이는 얼굴을 붉히고 네에-하고 얼버무리며 그 자리를 피하는 방법 외에 다른 대처방안을 알지 못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니면 쉬는 시간에 책상 위에 엎드려 쉬다가 남학생들이 반 여학생들의 몸이나 얼굴 따위를 평가하며 순위를 매기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과자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으면 남학생들이 대뜸 여학생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소녀시대 다리는 그렇게 매끈하던데 너넨 뭐냐? 과자 그만 좀 먹어 돼지들아, 따위를 언급하며 무안을 주어서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중학교 때 매일 한두 시간을 뛰어가며 어렵게 뺀 살인데, 다시 살이 찌기 싫다는 단순한 두려움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학교의 체육프로그램은 일주일에 1-2번, 20분(수업은 50분이었지만 실제로 몸을 움직이는 시간은 20분 미만이었다) 간 탁구 혹은 피구를 하는 정도가 다였다. 그마저도 2학년부터는 자습으로 대체했다. 밤에는 말 그대로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마당에 중학교 때와 같은 강도 또는 빈도의 운동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상황에서 아이가 택할 수 있는 옵션은 하나뿐이었다: 급식에 나온 밥은 먹지 않는 것.
아이는 중학교 수업 때 배운 지식으로 거식증과 폭식증 등 섭식장애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해 과제로 리서치 페이퍼도 쓴 적이 있었기에 오히려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은 섭식장애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는 반찬이랑 국은 먹잖아.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학교 급식 반찬이 부실하지 않았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성실하게 식판에 덜어진 밥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다 국그릇에 버렸고, 간식을 먹지 않았다. 성장기의 몸은 들어오는 영양소가 부족해지자 제 몸을 스스로 태우기 시작했다. 아이의 질량은 서서히 줄어갔다. 아이는 자신의 성공을 확인하기 위해 매일 체중계 위를 올라가 줄어가는 몸무게를 확인했다.
몸무게의 하향곡선이 주는 쾌감은 꽤나 짜릿했다. 아이는 그 곡선에 몸을 맡겼다. 쇄골과 날개뼈가 튀어나오는 게 좋았다. 여자 아이돌들도 다 상체 뼈들이 여기저기 튀어나오지 않았는가. 그들에 비하면 이건 나온 것도 아니지. 등을 구부리면 갈비뼈를 셀 수 있어도 아이는 개의치 않았다. 아직 허벅지 사이에 공간이 생기지도 않았는걸.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는 줄어가는 몸무게를 은근히 과시했다. 기만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입버릇처럼 나 살찐 것 같아, 빼야 하는데,라고 말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매일 한 알씩 먹던 메티마졸(갑상선 항진증 관련 호르몬제)을 먹지 않기 시작했다. 메티마졸은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신진대사를 억지로 낮춰 주는 역할을 해서, 메티마졸 복용 시 낮아진 신진대사로 인해 일시적으로 살이 찔 수도 있다. 약의 복용 여부는 일상생활에 가시적인 변화를 주지 않았으므로, 아이는 지겨운 이 알약을 이제 그만 먹어도 될 것 같다고 판단했다.
아이의 엄마는 가끔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잠든 아이의 옆에 가만히 앉아 아이의 심장소리를 듣다 가기도 했다. 다만 유치원생인 막내딸의 육아와, 복직한 이후 낯선 업무와, 퇴근 후 남편의 간호만으로 그녀는 충분히 지쳐 있었고 그 상황에서 그녀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허기는 일상이 되었다. 보통은 제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난동을 부리다 잦아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허기가 찾아왔다. 셔틀버스에서는 항상 잠이 드니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는데, 집에 와 식탁 위에 놓인 몽쉘 박스와 눈을 마주친 게 화근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읽었던 에리식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이는 낱개 포장된 몽쉘 한 개를 꺼내 봉지를 뜯어 게눈 감추듯 위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음 봉지를 뜯었다. 칼로리를 채우기 위해 빠르고 신속하게 몽쉘 여섯 개를 먹어치웠다. 짧은 식사가 끝나자 허기가 고개를 내리고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허둥지둥 체중계에 올라간다. 안도한다. 다행이다. 그대로네. 하지만 고개를 든 죄책감은 오래오래 타올라 마음에 그을음을 남겼다.
그 날 이후 폭식은 밤마다 고개를 들고 아이를 방문했다. 어느 날은 오레오 오즈 시리얼이었다. 또 어느 날은 오예스. 어느 날은 밥솥에 들어 있는 찐빵(겉에 있는 빵을 다 떼어 음식물쓰레기봉투에 버리고 안에 팥만 먹었다. 어차피 다 같은 탄수화물인데도 눈처럼 하얀 빵을 먹는 것은 왜인지 원죄를 짓는 것 같았다).
한바탕 먹고 나면 새카만 죄책감에 뒤척이다 잠에 들었다. 아침마다 속이 더부룩해서 다신 하지 말자고 마음먹어도 허기는 결국 찾아왔다. 몇 번은 구토를 하려고 시도해보기도 했다. 손가락이 훑고 간 목구멍이 쓰라려도 위는 음식을 꼭 붙들고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
이야기의 결말은 아주 느리게 찾아왔다.
정상범위 수준으로 낮춰 둔 갑상선 수치는 탱탱볼처럼 다시 치솟았다. 갑상선 항진증이 심해지면서 몸이 붓기 시작했다.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대사량에 쉽게 지치는 구조가 된 몸은 음식을 수시로 찾았다. 이성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허기가 자꾸 찾아왔다. 몸무게는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정상 수준의 몸무게가 되었지만, 상향하는 관성은 멈추지 않아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인생 최고치의 몸무게를 기록했다. 체중은 수능이 끝나고 이래저래 다시 감소하기 시작했지만, 아이가 약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하기까지는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갑상선 수치는 스물세 살이 되어서야 겨우 정상으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절식과 폭식은 위를 약하게 만들었다. 아이는 남은 고등학교 생활 내내 만성 위염과 소화불량을 달고 다녔다. 습관처럼 부채꼴 무늬가 표시된 소화제를 찾으러 양호실에 갔다. 소화제를 완전히 끊은 것은 대학교에 가고도 1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아이의 다이어트 타령과 예민한 모습에 지친 친구들은 1학년 말 즈음 아이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거기에 아이를 좋아했던 한 남자아이는, 아이가 고백을 거절하고 다른 아이와 사귀자 분노한 나머지 아이 험담을 적극적으로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의 친구들은 거기에 합류하거나 방관했다. 호기심에 시작한 첫 연애는 금방 끝났는데, 이번에는 그 남자 친구가 아이 욕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없던 사실까지 만들어내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허세를 부려가면서. 덕분에 아이는 한동안 고립되어 지내야 했다. 이 즈음 자퇴 이야기를 엄마에게 꺼내보기도 했다. 자해를 해보려고도 했지만 용기가 부족해서 손목에 생채기 정도나 내곤 했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결국 해피 엔딩이다. 많은 성장 소설이 그렇듯.
클리셰지만, 시간이 내 편이었다. 시간이 나에게 생각할 시간과 다른 공간에서 숨을 쉴 시간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시간을 허락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단단해졌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남을 사랑하는 법도.
가끔 2009년으로 돌아가, 아이 앞에 짜잔, 하고 어른이 된 내가 나타나는 상상을 한다.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상상 속에서 나는 긴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볼이 핼쑥하고 눈 밑에 그늘이 진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안아준다. 아이의 가족이 모두 생존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몸부림치던 때이므로 자기 자신에게도 서로에게도 품을 내줄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나를 만나면 안아주는 것 외에 어떤 위로를 건네는 것이 적합할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시간이 네 편이야, 같은 말은 그 시간을 이미 지나온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지 그 시간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할 수 있어, 힘내 등의 위로는 오히려 폭력적인 폭력적인 상투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중 최악이 "파이팅"이다).
그러니 거창하거나 로맨틱한 말을 건네는 것보다는, 아이를 힘껏 안아주고 나서 따뜻한 밥을 한상 가득 차려주고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기록된 것에는 힘이 있다는데, 이 모든 상상이 활자로 옮겨짐으로써 내 상상이 이미 일어난 일이 되어버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