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어둠만이 남고 잠은 오지 않을 때, 유독 크게 들리는 소리가 있다.
틱 틱 틱 틱...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려오는 시곗바늘 소리. 분명 불을 끄기 전만 해도 들리지 않던 소리였는데, 어찌나 크게 들리는지. 고요함 속에서도 내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재난문자처럼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그렇게 나의 뇌는 쓸데없이 활발해지다가 시계를 원망하기 시작했고, 이내 지나가는 시간 자체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왜 나를 가만히 놔두지 못할까. 그래서 시간과 직접 마주하고자 불을 다시 켜고 시간에 대해서 글을 써보려 한다.
시간은 '흐른다'라고 한다. 마치 물처럼 방향을 가지고 있으며,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지나간다. 이러한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그러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각자에게 달려있다. 때문에 동일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경쟁이 붙는다면 우리는 '시간 싸움'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시간이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믿기에, 이를 다스릴 방법을 고민 해왔다. 그러나 시간은 정말 다스릴 수 있는 것인가.
시간은 사실 무형의 존재인데, 시계라는 측정의 도구가 있음으로써 유형의 존재의 성질을 띤다. 예로부터 인간은 생존을 위해, 이후에는 농사를 짓기 위해 시계를 사용했다. 그러면서 시간을 낮과 밤의 구분에서 점점 세세하게 구분하게 되는데, 낮의 길이 혹은 달의 모습을 보고 양력과 음력을 만들었고 반복되는 하나의 주기를 1년이라고 정하면서,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있는지를 파악하게 된다.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시/분/초의 개념은 영국에서 시계탑이 생기고 나서라는 것을 유현준 교수님의 팟캐스트에서 들은 적이 있다.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사용자는 좀 더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방식이 필요했는데, 빅벤이라는 시계탑이 런던의 한 복판에 위치함으로써 모두가 시간이라는 정보를 공유하게 되고, 이에 따라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좀 더 규칙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영화 <모던 타임스>에 나온다. 영화에서 찰리 채플린은 정해진 시간에 노동을 하고, 일정 시간 휴식을 하고, 다시 노동을 하는 사이클 속에 살아간다. 시계가 없었다면 이러한 규칙적인 반복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더불어 <셜록 홈스> 같은 추리소설에서도 시간의 규칙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사건에 대해서 용의자들은 어떤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알리바이'를 증명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방식을 갖는다. 그런데 알리바이와 관련된 추리가 가능한 이유는 모두가 동일한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 있고, 시계탑이라는 기준이 없었다면 셜록은 아마 범인을 추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대 시간의 표준시(GMT)가 영국을 기준으로 하게 된 것도 시계탑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시계라는 요물은 언젠가 전 세계 곳곳에서 뿌리를 내렸고, 인터넷과 핸드폰의 보급 등으로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의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 일종의 동기화(Sync)가 이루어 짐으로써,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같은 시계를 보게 되었고, 보다 강한 시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시간을 다스리기는 커녕,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를 만들면서, 우리는 오히려 시간에 속박되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만 해도 12 간지로 구분되던 하루의 시간이, 지금은 0.001초보다 낮은 단위까지 계산되면서, 인간의 삶은 꽤나 팍팍해졌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누구보다 적어도 한 발은 빨라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적재산권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가치가 된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 아이디어가 자신의 것으로 인정받으려면 누구보다 빨리 그 아이디어를 POST 해야 한다. 내가 제일 먼저 했다는 Timestamp 기록은 내가 1등이라는 증거가 된다. 올림픽에서 사람들은 0.01초로 세계 신기록을 경쟁했지만, 이제는 기계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더 빠른지 밀리초를 다투고 있다. 시간과의 싸움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뉜다. 9시 1분은 9시가 아니라는 배달의 민족이 다른 민족들을 이긴 이유도,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時間)의 한자어를 뜯어보면, 때(時)와 때(時)의 사이(間)를 가리킨다. 한 시점, 한 시점이 모여 선을 이루는 것으로 우리는 보통 시간에 연속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하나의 선으로 형상화되어, 우리는 이를 영어로는 '타임라인'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시간 위에서 경쟁을 하면서, 시간을 소모하고 만드는 것들은 '지난 시간'이라는 자취이다. 누군가는 이를 역사라 부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이를 기억, 추억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이런 자취 위에서 인간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상황에 놓이곤 한다. 안타깝게도 과거를 지나간 것으로 그냥 두기에는 알 수 없는 뇌의 알고리즘이 그 부분만 자동 재생시켜, 나도 모르게 이불을 차게 만든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후회한다고 하며, 가능하다면 과거를 바꾸고 싶어 하기도 한다. SF의 단골 소재로 나오는 타임머신은 이러한 인간의 오랜 욕망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케이스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과거를 바꿀 능력이 없다. 이불을 아무리 세게 차도 기억 속에 나는 여전히 그 짓을 하고 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어쩌면 끊임없이 마주하는 현재에 있을지 모른다. 내가 현재 시점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적어도 지금의 내가 정할 수 있다. 앞으로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는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어떤 기대와 어떤 의지에 의해 현재 시점, 자취에 끝에 있는 내가 기록된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의지로 각자의 점을 찍어오고, 그 결과 지금이라는 시간에 위치한다.
Carpe, carpe, carpe diem, seize the day boys.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명대사이다. 우리 말로는 "오늘을 잡아라"로 직역이 될 텐데, 현재에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가 되겠다. 시간을 잡는다라는 말을 들으니, 최근에 서핑을 배웠던 것이 떠올랐다. 파도가 오는 것을 보고 서핑보드에 올라 서기 전에, 파도의 흐름을 타는 것을 '파도를 잡는다'라고 표현한다. 파도가 한 번 올 때, 하루가 지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얼마나 파도를 잡아서 올라타 봤을까.
물론 항상 좋은 파도가 오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매일매일이 반드시 좋은 날이 되기도 힘들 것이다. 그런데 파도를 잡으려면, 일단 파도를 잡을 준비는 되어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원망하기보다는, 내가 어떻게 시간을 잡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후회보다 더 많은 추억을 남길 방법이리라 생각한다. 내 인생의 끝은 알 수 없어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시간이라는 나의 바다에도 빛이 반짝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