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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Jan 12. 2021

[장문장] P와 농산코너


P는 급식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부정기적으로 두고 가는 생활비는 기숙사 생활을 하는 P에게 아슬아슬하게 맞아떨어졌다. 다만 P는 급식비를 한 학기 단위로 내야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고, P 마저도 잊고 있었던 일을 아버지가 기억할리도 만무했다. P는 급식비를 벌기 위해 공부를 제쳐두고 일을 한다는 사실이 썩 나쁘지 않았다. P는 불행을 즐겼다.

GS슈퍼마켙 농산물 코너에서 쌀가마를 나르고 바나나를 떨이로 팔았다. 버스에서 졸다가 유니폼을 두고 내려서 4만원을 변상했다. P는 아직도 유니폼 가격이 궁금했다. 초록색 비닐같은 상의와 하얀 위생모자가 4만원일수는 없었다.

종종 아줌마들이 총각, 하고 그를 불러세웠다. 어떤 쌀이 맛있냐고 물어보면 P는 웃으면서 “비싼 게 맛있어요.” 대답했다. P는 자신이 서비스업에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출근을 하면 2시간은 냉장창고에, 2시간은 매대에 서있다가 마감을 쳤다. 냉장창고는 항상 12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땀에 절도록 물건을 날라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책상머리에 달라붙어 있을 친구들을 생각하면 냉장창고에는 육체노동의 맛이 있었다. P는 선입선출을 배웠다. 먼저 들어온 것은 먼저 나가야한다. 냉장창고의 질서였다.

농산코너 팀장은 20대 후반의 얼굴이 넙데데하고 눈이 옹이구멍만한 사람이었다. 다른 팀장들은 그를 대졸이라고 불렀다. 팀장 중에 대졸자가 그밖에 없었던 것일테다. 대졸은 P에게 유니폼값으로 4만원을 청구했다. P는 하루 일하면 2만원을 벌었다.

쉬는 시간이 겹칠 때면 대졸은 자기 신세를 한탄하곤 했다. 자신은 이제 여기서 몇 년 구르다가 야채가게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P는 공부를 썩 잘했다. 스물 몇 살이 되면 인생이 결정나는 걸까. P는 이제 대졸의 나이가 되었다. 인생은 알 수가 없다. 인생은 알 수 없다는 것을 대졸이 모르는 걸 수도, 인생이 결정났다는 것을 P가 모르는 걸 수도 있다.

“너 왜 지금 일을 하냐?” 팀장이 물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라면 자의든 타의든 공부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P는 급식비를 벌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냐? 존나 고생한다.” 대졸은 별달리 감동을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시 P는 본인의 가난과 불행을 꽤나 자랑스럽게 여겼다. 학교 선생님 외에 처음만난 어른인 대졸의 퉁명스러운 대답은 P에게 꽤나 못마땅한 것이었다. P는 대졸이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P는 그때 처음으로 동정심을 구걸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P는 손톱을 자주 물어뜯었는데, 언젠가 TV에서 손톱을 물어뜯는 건 애정결핍의 한 증상이라고 했었다.

당시의 P에게는 십 팔 년 평생 자신에게 닥친 모든 불행이 놀랍고 새로웠지만, 이혼이나 가난, 질병 같은 건 사실 진부한 불행이었다. 너무 진부해서 TV에서도 더 이상 보여주지 않을 정도였다. P의 진부한 불행은 GS슈퍼마켙 농산코너에서 재고차트를 뒤적이는 대졸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되지 못했다. 대졸에게는 5년 뒤 야채가게나 열어야하는 자신의 불행이 더 관심사였다. 지금 대졸은 야채가게 사장이 되었을까.

P는 일주일에 3번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일을 했다. 당시 야간자율학습은 강제였고, 야자에서 빠지려면 타당한 사유가 있어야했다. P는 담임에게 학원에 간다고 이야기했다. 당시 공부 꽤나 한다는 친구들은 다 페르마 수학학원에 다녔다. P는 페르마 수학학원에 다니는 친구에게 학원비 영수증을 받아서 담임에게 제출했다. 학원에 가는 애들은 같은 시간에 같이 이동했는데, P는 언제나 조금 일찍 나가서 조금 늦게 들어왔다.

P가 두 달을 일했을 즘, P의 모의고사 성적은 완만하게 떨어졌다. 수학 성적만은 떨어지지 않았는데, 수학학원을 다니는데 수학 성적이 떨어질 수는 없다는 P 나름의 치밀함이었다. 아마 담임은 알고 있었을거야, P는 말했다. 담임은 기력이 없고 조금은 치졸한 사람이어서, 아무리 형편 없는 변명이라도 달갑게 받아들였다.

2달이 지나고, P는 급식비를 두 번은 낼 돈을 벌었다. P는 담임에게 학원을 그만 둔다고 말했다.

“왜, 학원에서 배울 게 없어?” 담임이 물었다.

“돈 아까워서요.” P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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