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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Oct 25. 2020

[문곰] 취직했더니 은행원이었던 건에 대하여

직업적 글쓰기

나는 어쩌다보니 은행에 다니고 있다.


원래 은행원이 되고 싶었나? 그건 아닌데, 취업 원서를 여기저기 넣다보니 최종합격한 곳이 은행이었다. 비단 나 뿐만 아니라,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블로그 - 이 사람들의 블로그를 찾는 쉬운 방법은 펀드투자권유자문인력 등 금융 자격증 합격 수기로 찾거나, 예적금/카드/펀드 등의 금융상품 키워드로 검색하면 금방 나온다 - 중 취업 과정을 적은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대부분 은행만을 목표로 한 사람은 잘 찾지 못했다. 그만큼 나와 비슷하게 어쩌다 은행원이 된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은행이 여전히 새로운 인력 보충을 필요로 하기에 TO가 많거니와, 비슷한 연봉을 받는 타 직군들에 비해 진입장벽 또한 상대적으로 낮아서 그렇지 않나 싶다. 그러나 진입장벽이 낮다는 것이 취업이 쉽다는 것이 아니다. 의외로 은행을 합격한 경우, 여러 시중은행 또는 승무원에 동시에 합격한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될놈될이라는 진리를 반영한다. 다만 나는 그런 타고난 측면보다는 프로그래밍을 할줄아는 경영학과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이용해서 은행권의 DT라는 시대적 흐름에 편승한 운이 좋은 케이스이다. 또한 은행원은 취업하고나서도 공부를 어쩔 수 없이 계속해야하는 직업중에 하나기에, 영원히 고통 받는다. (자격증을 따야 상품판매가 가능하고, 인사고과에 자격증이 반영... 할말은 무지 많지만 아래 유튜브로 갈음한다.)


tvN 유퀴즈온더블럭 - 신입은행원


보통 은행원이라고 하면 영업점에서 만나는 창구 직원을 떠올린다. 나또한 그랬고, 지금 하는 일이 빠른 창구 업무다. 그러나 은행원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은행원은 아니다. 일선 영업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 사람들이 수익을 올리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만 (특히, 여신-대출 관련 업무를 통한 수익이 제일 크다), 후선 부서에서 지원/관리 등의 업무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 앞서 입사한 선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영업점에서 일할때는 정말 은행에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면, 후선부서에서 일하는 지금은 그냥 대기업에 다니는 느낌이라고 한다. 이 말을 빌려서 다시 생각해보면,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흔히 일컫는 '은행'은 은행 영업점을 생각하고 있지 않나 싶다.


각설하고 창구에서 일을 하다보면, 여기가 흡사 전쟁터라고 생각될 정도로 정신이 없다. 끊임없이 손님들은 쏟아지는데 창구직원 3-4명이 모든 손님들을 차례로 상대해야 한다. 지금까지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때, 수신 업무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비중은 통장 이월이다. 그 다음이 입출금이고, 세번째가 OTP재발급인 것 같다. 요새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바일이나 ATM을 통해 입출금 업무를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창구에 굳이 들러야 되는 이유는 분명 피치못할 사정이 있어서다. 통장을 새로 바꾸는 일과 OTP발급은 무조건 창구에서 해야하니,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도 번호표를 뽑고 아날로그의 방식을 택해야하는 것이다.


한편 여전히 단순 입출금 업무도 많은데,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100만원 이하의 거래를 하는 것도 있지만, 창구에서도 몇억이 오가기도 한다. 돈과 관련된 일은 실수를 하면 바로 죽음이다. 그래서 전쟁터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사실 대면업무 특성상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가 많아서 더 전쟁터 같다. 예를 들어, 요새는 입출금통장을 만드려면, 통장을 만드려는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가 증빙 되어야 개설이 가능하다. (혹은 서류 없이 출금한도가 1일 100만원 이하로 제한되는 한도제한계좌로 개설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내 통장도 마음대로 개설이 안되냐며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편이다. 이외에도 신분증 없이 와서 거래를 요구하는 분들, 통장 없이 출금을 요구하는 분들이 종종 있으며, 낮은 확률로 낮술을 먹고 오시는 분들, 마스크를 쓰지 않는 분들 등이 있다.


손님으로 펭수 => 실화 / 직원으로 펭수 => 매우 큰일남


여기에 창구직원들은 수시로 울리는 전화를 중간중간 상대해야하기도 한다. 버젓한 콜센터가 있지만,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는게 확실하다고, 영업점에 전화를 많이들 하신다. 안타깝지만 전화를 통해서는 본인을 확인할 수 없다. 그렇기에 처리할 수 있는 업무가 거의 없으니, 영업점 내방을 부탁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도 실랑이가 간혹 발생한다. 그렇게 앞에서 손님들은 기다리고 있고, 대기순번은 늘어가는데, 전화벨소리는 멈추지 않고, 심지어 PC 또한 자주 멈춰서 정신이 혼미한 시간들을 보낸다. (그렇다고 점심시간 1시간 보장도 안되고!! 씨벌탱) 안타깝게도 이런 전쟁은 입출금 창구에 대한 이야기였고, 여기가 육지에서 국지전이라면 대출창구에서는 화력전이 일어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코로나19로 영업점에는 아크릴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직원과 손님 모두 마스크를 쓰고 대화한다 (https://www.ajunews.com/view/20200318073450089)
은행의 풍경이 교도소 면회와 비슷해졌으며, 서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좌: 영화<너는내운명> 중, 우: JTBC <아는형님>)


이렇게 매일매일 전쟁을 치루고, 4시부터는 마감을 한다. (사실 4시부터 마감을 하고 싶으나, 손님이 밀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4시에 딱 맞춰서 오는 손님들도 있으며, 4시가 지났는데 어떻게 후문을 통해서 들어와 업무처리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보통은 4시반에 마감을 하는 것 같다.) 이때는 가장 중요한 시재를 맞추고, 각종 서류정리 및 결재를 받으며, 각자 맡은 업무를 비로소 본다. 그러다보면 (시재가 맞았다면) 6시에서 7시 사이가 되는데, 퇴근시간만 놓고 보면 은행 영업점은 워라밸이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work intensity는 진작에 가출했으며, 대부계는 야근이 일상이다.)


그리고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환복을 하면,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들이 있다. 일종의 전리품이라 해야하나... 아직 입사한지 1년도 안되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골무, 클립, 고무줄 따위가 내 주머니에서 발견된다. 전부 서류를 정리할때 필요한 것들인데, 특히 골무는 내가 필요할때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왜 주머니에 있는 걸까 생각이 들곤 한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예측 할 수 없는게 영업점일이다보니,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느낌으로 요새는 지내고 있다. 오늘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님이 별세하셨는데, 지난 금요일에 상속업무를 처리했더니, 회장님 상속업무도 누군가 하겠구나라는 생각부터 했다. 영업점을 벗어나면 뭐가 좀 바뀌려나 싶다.

이거 찐임. (tvn<비밀의숲> -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2/2017082202170.html)


그래서 결론은 은행에 방문하셨다면, 너무 은행원한테 야박하게 대하지 말아주시길. 분명 불친절한 직원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행원들은 불친절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좋은 말씀을 주시거나, 고맙다는 인사해주시면 그것만으로도 힘이 난다. ATM과 달리 기계가 아닌 사람이기에 조금 늦어도 양해해주시길 바란다. 돈이 민감한 문제인지는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다그치는 것은 오히려 직원의 업무처리를 늦출 뿐입니다.


또한 주변에 은행원 친구를 뒀다면, 그냥 힘들게 사는구나 이렇게 여겨주면 좋겠다. 갑자기 연락와서 대출싸게 하는 방법 물어보는 것도 좋지만, 그러기 전에 은행어플 하나 설치해주고, 신용카드 하나 발급해주면 은행원 친구가 오히려 밥을 사줄거다. 그때 궁금한거 다 물어보시구... 참, 아직 주택청약저축을 안했다면 당장 드시게나.


그리고 직접 현장에서 느낀 점은... 은행원이 4차 산업혁명으로 없어질 직업 순위권에 들고 있지만, 매일 전쟁터인 영업점을 보면 그런 날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여전히 은행의 대면업무는 필수적이고, 아직 인터넷은행이 대체하지 못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직업으로써의 은행원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직업 같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게다가 말을 잘한다면 정말 좋은 직업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빨리 전부 비대면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메인 이미지 : 이사배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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