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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Dec 23. 2020

[미스트] 우유

세상엔 구미를 당기게 하는 자극적이고 중독적인 맛들이 많지만 내겐 유독 흰 우유의 묵직한 고소함이 그러하다. 초코우유 딸기우유는 너무 달고 흰우유가 좋다.


어릴 적엔 아침 식사나 저녁 야식같은 느낌으로 설탕을 탄 따뜻한 우유를 엄마가 자주 만들어주셨다. 그 맛있는 걸 엄마가 더 이상 해주지 않으시자 어느 정도 컸을 때 내가 직접 해먹어보려 한 적이 있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찬 우유를 주전자에 붓고 데우는데 잘 데워지지 않길래 제일 센 불로 올려버렸다. 그랬더니 잠깐 딴 데 보고 있은 새에 주전자의 온 구멍으로 우유가 끓어 넘쳐 가스레인지를 덮어버렸다. 급하게 불을 끄고 일단 넘친 건 넘친 거고 이제 먹어보자 하고 컵에 따라 설탕을 넣었더니 이게 웬걸. 이상한 우유막같은 것이 입안에 걸려 느낌도 이상하고 설탕 단내가 아닌 탄내가 입에 잔뜩 머금어졌다. 두어 번 더 시도해봤지만, 그때마다 이러다 내가 집에 불을 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만 커졌고 그 뒤로 시도하지 않았다.


엄마를 포함한 외가 쪽 식구들은 키가 작다. 엄마는 나와 동생 키가 평균치는 됐으면 하시며 집에 우유가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두셨다. 물 대신 우유를 따라 마시는 모습을 보시면 우유를 좋아해서 다행이라며 많이 마시라 토닥여주셨다. 내게 우유는 엄마의 관심이 실체화된 식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성장이 멈춘 지 오래인 지금도 라떼를 좋아한다.


최근 팔꿈치 쪽에 가렵고 열이 나는 것이 뭔가 알레르기 반응이 심해지는 거 같아서 피부를 다녀왔다. 여름이면 연례행사처럼 겪었던 일이라 크게 대수롭진 않았다.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견디기도 보기에도 좋지 않아 병원을 다녀왔다.


의사 선생님은 알레르기 반응 검사를 해보자고 하셨고 2주 뒤에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갔다. 말투가 조곤조곤하고 점잖으신 의사 선생님은 ‘딱히 알레르기가 있진 않은데… 우유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네요.’라며 검사 결과지를 보여주셨다. 선생님과 검사 결과지를 같이 보니 땅콩, 해산물, 고기 등이며 여러 식자재에 대한 항목들과 그와 나란히 0이라는 숫자가 종이 가득 나열되어 있었고 우유만 2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세상에… 한평생 아무 생각 없이 잘 먹어온 우유, 심지어 챙겨 먹기도 했던 우유에 알레르기가 있는 몸이라니 내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도 의외라는 나의 반응을 보시곤 당분간만 우유를 먹지 말아보자고 하셨다.

요새 상황도 상황이다 보니 카페에 가기도 뭐하고 집에서 커피나 배달 시켜 먹을까 하고 메뉴를 보는데 어째 맛있는 음료들을 죄다 라떼나 밀크티가 단어가 뒤에 붙는다. 말차라떼, 생크림 딸기 라떼, 공차 타로 밀크티. 내가 우유를 좋아하니 그런 것만 더 눈에 보인다. 생각해보다 아인슈페너는 우유가 안 들어가서 괜찮겠다 싶은데 우유 대신 크림 덩어리를 마시는 게 좋은 건가 싶다.


이럴 땐 어찌해야 할까. 내가 좋아하는 게 내게 해로울 땐 피하는 게 능사인가. 좋아하는 거 참느라 짜증이 날 바에야 그냥 원하는 대로 하는 게 내 정신건강을 위해 좋은 게 아닐까.


인간관계에도 그럴 때가 있다. 이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차마 놓지 못하는 관계들이 있다. 정 때문일 수도 그 후폭풍이 무서워서 일수도 있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아픈 거 참다 보면 내성이 생기는 관계란 없는 것 같다. 근본적인 치료가 되기 전까진 거리를 두는 게 나를 위한 길이다.


피하고 보자니 생각보다 우유가 들어간 게 너무 많다. 평생 안 먹고 살진 않겠지만 더 나은 선택지들이 있을 때 그걸 고를 만큼의 자제력을 발휘해보자 라고 다짐했다. 꼭 참는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다. 대체품을 찾으면 된다. 예전에 ‘웨딩 임페리얼’이라는 차가 향이 좋았던 기억이 나서 30개짜리 티백으로 주문했다. 언제 주문했는지 잊혀질 때쯤 집에 도착했다.


보통 택배 아저씨만큼 반가운 사람이 잘 없다는데 솔직히 난 택배가 와도 크게 설레거나 기쁘진 않다. 여느 때처럼 그저 내가 주문한 게 무사히 왔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비닐을 뜯었다.


그랬더니 상상 이상으로 진한 바닐라 향 같은 것이 확 느껴졌다. 너무 진해서 화이트 초콜렛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티백에서 삐져나왔는지 상자에도 가루 같은 것들이 묻어있어 티백 상자를 만졌던 손까지 향이 베어버렸다.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코를 박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야 이건 따뜻한 우유에 우려내면 진짜 맛있겠다’라는 생각이 스쳐 갔다.


작은 상자 빼곡히 만두마냥 싸져 옹기종기 모여있는 티백을 보자니 왠지 그 모양새를 깨뜨리고 싶지 않고 30개 티백이 뿜어내는 향이 달아날까 바로 상자를 덮어버렸다. 혹시나 하고 얼른 물을 끓여 먹어봤지만 역시나 화이트 초콜렛 같은 맛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잔잔한 향과 따뜻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젠 내가 나를 챙겨야 한다. 이렇게 조금씩 시도해보고 스스로 잘했다 다독여주면 그 쌉싸름한 티도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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