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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Jan 25. 2021

[꿈글] 나츠카

처음 그곳은 아주 낯설었다.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지만, 은연히 퍼지는 차분함 덕분에 겉도는 느낌이 금세 사라졌다.


책상은 플라스틱 바퀴가 달려있는 이동식 책상이었고 바퀴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삐걱거리며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함부로 책상을 움직여 바퀴를 억지로 굴렸다간 바퀴가 툭 빠져버릴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리는 곳은 처음이지만 기분 좋은 소리가 나를 사로잡았다. 소리의 행방은 앞 쪽에 앉은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의 손에는 하얀색 커터칼이 들려있었고, 연필을 굴리며 깎고 있었다. 그녀가 연필을 깎고 있는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곁눈질로 몰래 훔쳐보다 어느새 넋을 놓았고 그녀가 아닌 연필이 깎여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잘 깎인 연필을 집어 들고 스케치북을 펼쳤다. 나는 그제서야 계속 그녀 쪽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헐레벌떡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림을 완성시킨 사람들은 강의실 앞 쪽 칠판에 그림을 올려두었다. 나의 스케치북에도 어느 정도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림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민망한 실력이었지만, 나름 보람을 느꼈다. 그녀도 그림을 완성시켰는지 지우개 가루를 털어냈다. 무심코 보인 그녀의 그림에는 장미가 그려져 있었다. 정확한 장미의 생김새는 모르지만 줄기에 가시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알았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그림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걸 느겼는 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꽃을 좋아하나요?"

"아.. 네 뭐. 저도 모르게 계속 보고 있었네요. 죄송해요."


그녀는 내 대답에 괜찮다며 말을 이었다.


"장미는 사계절 내내 피울 수 있대요. 참 신기하죠. 시들어 저버리다가도 금방 다시 피어나요. 그쪽이 그린 그림도 보여줄 수 있나요? 눈이 그리 좋지 않아서요."


그녀의 책상에 스케치북을 올렸다. 보여주기 민망한 그림이었지만 왠지 그녀는 내 크로키를 보고 멋진 의미를 부여해줄 것 같았다. 그녀와 나눈 몇 마디 대화에서 느낀 것은 그녀의 목소리가 맑다는 것과 나의 그림을 보고도 비웃지 않을 것 같다는 게 전부였다.


"달은 외로울까요?"


내가 그린 그림 속 달을 보고 한 말인지, 아니면 정말 달을 보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달은 외로울 것 같았다.


"조금은."


그녀는 작은 손으로 연필을 들고 내게 무언의 사인을 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내가 그린 달 옆에 나비를 그려 넣었다. 두 마리의 나비는 내가 그린 달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내가 그린 그림에 비해 나비가 너무 잘 그려졌다.


"이젠 외롭지 않겠죠?"


-


그녀는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 들린다고 했다. 같은 건물에 위치해서 나도 종종 들리곤 했는데, 오늘도 때마침 대출 연장을 신청하려던 때라 그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혹시 '소년의 빛'이라는 작품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미안해요. 잘 모르겠네요."

"소년의 빛이라는 작품에는 한 소년이 나오는데, 달을 보고 이런 말을 해요. '외로워하지 마, 언제나 너를 보고 있어'라고. 아마 아까 당신의 그림 속 달도 외롭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매번 바라봐 준다면, 물론 제가 그린 나비도 한몫하겠죠?"


그녀는 상냥했다. 배려심이 깊었다. 나에게만이 아니었다. 내가 그린 그림에게까지도 그랬다. '그림이 외로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필요 없었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하나하나 집중되었고, 받아들여졌다. 자연스러웠고 기분 좋게 나를 두드렸다.


"고마워요."

"이름이 뭐예요? 사실 이런 건 남자가 먼저 물어보지 않나?"

"저는 구여준이라고 해요. 그쪽은요?" 괜한 민망함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츠카에요"


 당연하게도 한국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말투도 외형에서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그녀에게서는 전혀 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한국 이름은 따로 없었다. 그저 자신의 이름이 좋기 때문에 한국 이름을 짓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럼 책 재미있게 읽어요."


그녀는 열람실로 들어갔다. 마음 같아선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녀의 차분한 마무리 인사에 나의 용기는 금세 사라졌다.





먼 훗날, 아니 조금은 가까운 어느 날,


그녀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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