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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Nov 19. 2020

[Parapluie] 엄마와 들국화

어떤 일상

"너희 아빠 말이야, 사실 결혼을 엄청 고민했었어."


운전을 하던 엄마가 대뜸 말한다.


"엥, 대체 왜?" 나는 엄마의 얼굴을 살피며 묻는다.


"아빠가 첫사랑이 열두 살 때 같은 반 친구였던가. 엄마랑 결혼하기 직전 아빠가 지방에서 의경 복무할 때, 그때 우연히 만났대. 아빠가 그때 두 여자 사이에서 고민하느라 심하게 앓기까지 했다더라."


1980년대 말이었다. 아빠는 평소처럼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나갔고, 최루탄과 비명과 먼지와 소음 한 복판에서 시위를 하던 자신의 첫사랑을 운명처럼 마주친 것이다. 초등학교 때 첫사랑이 운동권 출신 여대생이 되어 경찰대 출신 의경 앞에 이렇게 우연히 나타나다니. 흔한 영화의 한 장면 아니던가. 그 둘은 시위 후 두어 번 다방에서 만났다. 당시 여성분은 남자 친구가 감옥에 있었고, 그분의 가족이 아빠에게 따로 연락을 취할 정도로 꽤나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아빠에게 첫사랑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상상해본 적은 있다. 하지만 엄마 입에서 그 얘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 친한 언니로부터 옛 연애 썰을 듣는 기분이다.


마포대교를 건넌다. 엄마는 좌회전을 하며 마포 공영주차장 방향으로 향한다.


"그런데 말이야, 아빠가 나중에 초등학교 동창회를 갔는데 거기서 또 만난 거 있지. 그때 그분은 학습지 교사였대. 남편 직업은 기억이 안 나네."


"아우 정말, 왜 하필이면 그렇게 만날 때마다 청순가련한 환경에 처해 있었대. 굳이 첫사랑 아니었어도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상황에 계속 계시네."


엄마는 소녀처럼 깔깔 웃는다. 내가 사는 오피스텔 주차장에 도착한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탄다.


"그러니까 말이야, 별 일 없었다지만 그냥 마주쳤다는 사실을 아는 게 그렇게 신경이 쓰이대. 내가 너무했나?"


"아니 엄마, 나는 내 남편이나 남자 친구가 그랬으면 이미 반은 죽였어."


엄마가 또 소리 내어 웃는다. 웃을 때 엄마 얼굴은 나이를 거꾸로 달려간다. 엄마가 아니라 꼭 큰언니 같다.


"엄마 그래서 어떻게 했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복도를 지나 내 방으로 간다.


"그래서... 너네 할머니한테 전화를 했지. 너네 아빠는 원래 뭐든 입을 잘 여는 법이 없으니 추궁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고, 할머니랑 큰고모는 그분의 존재를 아니까. 할머니가 바로 그 집에 전화를 걸었대. 각자 가정 있는 집끼리 서로 마주칠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문을 연다.


"오 할머니 세다. 엄마 커피 내려줄게.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아메리카노. 음, 할머니 입장에서는 이제 승진을 앞둔 당신 아들 앞길에 걸림돌이 될 만한 건 다 치워야 했겠지."


원두를 그라인더에 간다.


"고부간에 이해관계가 마침 들어맞았구먼."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내린다. 위이잉-소리가 요란하다.


"마침 그런 셈이지. 아, 이게 그 고친 턴테이블이구나." 엄마가 최근에 새로 들인 턴테이블을 가리킨다.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조금 부어 엄마에게 건넨다.


"여기 커피. 글쎄 이거 못 고치는 줄 알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세운상가에 납땜 장인들이 그렇게 많다길래 우선 가져가 봤지. 이틀 만에 고쳐 주시대. 그저께 세운상가에서 요 녀석 안고 열심히 집으로 왔어. 엄마 뭐 틀어줄까?"


"음, 커피 향 좋다. 뭐 있는데?"


"어제 내가 중고로 산 존 메이어도 있고, 재이 언니가 자기 듣겠다고 가져온 게 더 많아. 양희은, 비틀스, 들국화."


"들국화가 있어?"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웅 들국화 라이브래." 엄마에게 바이닐을 건넨다.


"아, 들국화 엄마 한창 이십 대 때 많이 들었는데." 엄마는 바이닐 커버 안쪽에 빼곡하게 적힌 노래 리스트를 훑어본다.


"<행진>이랑, <축복합니다>랑, <그것만이 내 세상>, 요거 듣자. 아, <매일 그대와>도 부탁해." 엄마가 나에게 바이닐을 건네며 말한다.


라이브를 녹화한 바이닐에는 곡과 곡 간 구분선이 없다. 나는  대충 행진이 나올법한 지점에 헤드셀을 가져다 댄다. 그 전 곡인 <아침이 밝아올때까지>의 뒷부분이 방 안을 채운다. 우리는 가만히 듣는다.


들국화의 <행진>이 들려 나온다. 커피를 두 손으로 마주 잡고 눈을 감은 엄마의 얼굴에 순식간에 20대 학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엄마는 전주를 한 마디 한 마디 음미한다. 가사를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후렴구가 시작되자 엄마는 커피를 놓고 두 손을 올리고 흔들며 "행-진"하고 따라 부른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나는 그런 엄마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가슴에서 사랑이 절절 흘러나온다. 이 순간을 사진을 찍듯 기억하겠다고 다짐한다.


곡이 끝나고, 엄마는 수줍은 얼굴로 커피를 마신다.


"왜, 우리도 그땐 나름 치열하게 젊음을 살아냈어."


"회색 분자였다고 자칭하시더니." 나는 바이닐을 Side B로 바꾼다.


"그래서 더 힘들었지. 나는 어디에도 못 속해 있었거든. 극단만이 목소리와 당위성을 가지던 시절이었어. 그것이 엘리트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많았고."


"나도 집단에 잘 속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잘 없는데, 이건 엄마를 닮았나."


"글쎄. 20대의 나는 겁도 많고 생각도 많았어. 그런데 그걸 표현할 용기는 없어서 숨을 곳을 찾고 싶어 했던 것 같아."


"그게 보통의 20대 아닐까. 나는 그래서 내가 나이가 드는 게 좋아 엄마. 스무 살로 돌아갈 생각 하면 마음이 벌써 괜히 바빠져. 그땐 항상 조바심을 내며 지냈던 것 같아."


헤드셀이 Side B 맨 안쪽을 향해 미끄러진다. 나는 다음 바이닐을 꺼낸다. <난 이제 내일부터는>을 부르는 전인권의 목소리가 다시 방 안을 채운다.


"엄마 시간 여행하는 것 같."


"너 덕분에. 다시는 LP는 못 볼 줄 알았는데, 2020년에 내 딸이 이걸 듣다니."


"내가 좀 클래식하지. 올드한 건가.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 아빠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너네 아빠랑 종종 뮤직 라이브 바도 놀러 가곤 했는데. 결혼하고도 너네 데리고도 한두 번 갔어."


"진짜? 나는 왜 기억이 없지."


"너네가 한창 어릴 때였으니까. 너랑 유진이는 듣다 곯아떨어지면 너네 업고 안고 집으로 왔어."


우리는 그렇게 바이닐의 모든 사이드를 듣는다.


"바이닐은 묘하게 소리가 따뜻해. CD만 해도 조금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데." 엄마가 일어나며 말한다.


나는 엄마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한다. 그리고 엄마에게 축복의 노래를 속으로 부른다.

오늘 이렇게 우리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당신의 앞길을 축복합니다


그동안 지나온 수많은 일들이
하나둘 눈앞을 스쳐가는데


때로는 기쁨에 때로는 슬픔에
울음과 웃음으로 지나온 날들


이제는 모두가 지나버린 일들
우리에겐 앞으로의 밝은 날들뿐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날 때에는
웃으며 서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다짐하며 오늘의 영광을
당신께 이 노래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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