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어릴 적의 모습을 하고 있다. 까까머리에 여윈 어깨와 고집 센 눈동자의 내 아이 뒤에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아이가 달려가기 시작한다. 아니, 쫓긴다. 어두운 것에 쫓기다 다리가 풀려 넘어진다. 피범벅이 된다. 아이를 일으켜 세우려고 정이가 자꾸 손을 뻗는데 다리가 땅 위에 나무뿌리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한다. 어두운 것을 혼내려고 소리를 질러 보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아이가 달려가기 시작한다. 깡마른 다리로 뛰는 모습이 어설프다.
까까머리에 여윈 어깨와 고집 센 눈동자의 내 아이. 넘어진 무릎에 흥건하던 피.
아이 뒤에는 제 형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손주와 불공을 드리러 절로 향하는 돌계단을 오른다. 백일 때부터 내 손으로 천 기저귀를 갈고 이유식과 미숫가루를 먹여 키운 손주는 표정이 맑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둥그런 양 어깨 위에 올렸다. 정이는 아이가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아이의 모습이 낯설다. 아이의 뒷모습과 땋은 머리 사이의 가르마를 망연히 바라본다. 할무이 뭐해? 얼른 와. 아이가 정이의 손을 쥐고 재촉한다. 정이는 아이의 손을 잡고 계단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밟아 오른다. 평소라면 진작 욱신거려야 할 오른쪽 무릎이 하나도 아프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