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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Dec 24. 2020

[미스트] 그래도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온도와 분위기를 떠오르게 만드는 단어들이 있다. 할머니는 따뜻하면서도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아마 말년이라는 나이대가 주는 잔잔함, 무조건적인 사랑이 만들어낸 심상일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즈음 할머니를 우리 집에서 모시게 되었다. 말에서 알 수 있듯 어린 손주, 손녀를 봐주기 위해 오신 게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를 시골에 홀로 두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럼 어느 집에서 모실 건가 좀 더 어른들만의 대화가 오간 후 우리 집으로 오시게 되었다. 그 전엔 명절 때나 한 달에 두어 번 시골에 내려가 만나던 할머니여서 어색하고 크게 정도 미움도 없었다.


그리고 암흑기와 같은 시기가 시작됐다. 점점 거동이 불편해지시던 할머니가 혼자 계신 시간을 최소화해야 했기에 누군가는 만사 제쳐두고 집에 머물러야 했다. 물리적인 보살핌으로 몸이 힘든 것보다 정신이 남아나질 않았다. 집에 있으면 하루에도 수십번 내 이름을 부르시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셨다. 차라리 알아듣지 못할 외계어를 하셨음 나았을 것을, 참기 힘든 억측과 불만을 늘어놓으셨다. 집안 분위기는 살얼음판이었다. 조용할 날이 없고 화목은 적어도 우리 집과 무관한 일이었다. 그때 일들을 생각하자니 아직도 한숨부터 나오고 고개를 젓게 된다. 서로 말은 안 해도 가족들 각자 가까스로 하루를 버티기 바빴다.


그렇게 내 생활은 사라졌다. 새벽에도 수시로 깨어나야 했고 친구들과 만남은 뒷전으로 미뤄지기 일쑤였다. 밖에 있어도 온 신경이 곤두서 집을 향해 있으면서도 막상 집에 갈 땐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으려나 두려움에 최대한 천천히 걸어갔다.


친구들에게 자초지종을 늘어놓지도 못했다. 굳이 내색해서 밖에서까지 어두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무슨 자만스런 마음인지 어차피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유일하게 심경을 말한 상대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랑 산 적이 있던 중학교 같은 반 친구였다. 어쩌다 서로의 사정을 알게 되고 난 후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냉장고에 있던 물회와 반찬들을 꺼내 밥을 차려줬다. 밥을 먹고 나니 주전부리를 내 앞에 두고선 자기 얘기를 해줬다. 그리곤 더 긴 시간 동안 내 얘기를 들어주었고 어떤 못된 말을 해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럼 난 어떻게든 짬을 내 그 친구 집에서 쉬다 집에 갔다. 돌이켜보니 중학생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참 정 많은 친구였다.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물회를 볼 때면 그 친구가 생각난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뒤 더는 아닌 것 같다는 친척들의 합의 후, 할머니는 병원에서 지내셨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할머니는 앙상하리만큼 살이 빠진 모습이었다. 풍채가 좋다 까진 아니지만, 꽤 통통한 체격이셨는데 얼굴은 그 골격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누가 들지 않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소변줄을 낀 채로 병실에 누워계셨다. 그때 처음으로 사람이 수명을 다할 때의 모습은 이런 거구나라고 느꼈다.


고등학교 시험 기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음 날이면 시험이 끝나기에 나는 마저 시험을 치고 장례식에 가기로 했다. 거의 연락을 안 하던 사촌 언니가 전화를 했다. 할머니 장례식인데 어떻게 당장 내려오지 않을 수 있냐 나를 나무랐다. 크게 언성을 높이진 않았지만 분명 화가 난 어조였고 나는 나이가 한참 많은 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벙벙하게 통화를 끝내고 몇 초를 멍하니 있었다. 저 멀리서 발을 구르던 물소 떼가 눈앞에 지나가듯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내가 그간 어떤 생활을 했는지, 그로 인해 내 학창 시절과 입시가 얼마나 처참하게 박살 났는지, 명절 때마다 몇몇 사람들 멱살을 잡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아무 말 않고 시험을 치고 장례식장에 갔다. 그냥 조용히 이 모든 걸 넘겨내고 싶었다.


밭엔 얼음이 끼고 요즘처럼 추운 날이었다. 가장 좋아하던 진분홍색 패딩을 입고 갔다. 미리 장례식장에 있던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장례식에 이런 옷을 입고 오면 어쩌냐며 다른 친척의 외투로 내 옷을 덮어버렸다. 별 생각 없이 손에 집히는 대로 입고 갔는데 순간 아차 싶었다. 기억이 훨씬 없는 할아버지 장례식에서도 눈물이 났었는데 할머니 장례식에선 울지 않았다. 솔직히 속으로 드디어 돌아가셨구나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서로 얘기하느라 그런 내 반응에 크게 신경을 안 쓰는 듯 보였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드라마에선 악연조차 마지막에 어떻게든 용서와 화해로 끝내는 경우가 많지만 나와 할머니의 관계는 그렇지 못했다. 대화다운 대화, 마지막 인사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제 내가 하는 거라곤 성묘 때 절 올리는 게 다임에도 여전히 할머니는 내게 복잡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미움만은 아니다. 그저 녹록지 않은 삶을 힘겹게 사시다 보니 그러셨으리라 생각하고 이제는 적막한 방이 본인도 답답하셨겠지라는 연민도 살짝 느낄 정도가 되었다.


가끔 상념에 잡혀 침침한 속을 돌아볼 때마다 걱정이 든다. 이런 거뭇한 지난날과 감정들이 아직도 내 어딘가에 스며있어 드러나고 있진 않을까. 나의 불안정한 관계들과 결핍이 내 발목을 잡진 않을까.


그래도 돌아보면 그런 경험들은 스스로 더 많은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떻게 늙어 죽고 싶은지. 어떻게든 내 마음을 추스르고 다독여야 했던 나날이었다. 훗날 그런 집이니 넌 어쩔 수 없는 애였구나 소리 듣기 싫어서라도 더 단정하고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정의 화목은 동서고금하고 절대적 가치지만 그런 당연한 관계가 순탄치 않았다 해서 일생의 관계들이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의 인격이 만들어지는 데엔 여러 요소가 작용한다. 나이가 들수록 그 요소들이 추가되고 이들 간 상관계수도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다. 눈에 보이는 사실들만으로 어떻게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사실에 기인한 경향성은 빠른 판단을 하기 용이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확률적인 가설일뿐 누군가를 알고 싶으면 더 많은 대화와 그의 선택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처럼 내게도 쓰라린 관계들이 있지만 아파하기만 하면 나는 평생 환자로 살 것이다. 그러기엔 살 날이 훨씬 많고 더 많은 일을 해보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산타의 선물을 기대할 나이는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를 앞두곤 무엇이든 빌어보고 싶다. 아직 어떤 삶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머리로만 하지 않기를, 내게만 관대한 이중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를 염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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