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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Jan 10. 2021

[미스트] 저는 안개분자 미스트입니다

산만-하다 散(흩을 산) 漫(흩어질 만) — : 어수선하여 질서나 통일성이 없음을 뜻하는 형용사

내 머릿속을 보고 내린 나의 소견이다.


어린 시절 주말 아침 10시쯤 공중파 채널에선 온 가족이 볼 법한 프로들을 많이 했다. 난 그중에서 유독 퀴즈쇼들을 좋아했고 왠지 모르겠지만 내가 답하지 못한 문제와 답을 다이어리에 기록했다. 물론 답을 추측조차 하지 못한 문제들이 태반이었고 MC가 문제를 읊는 속도가 내 필기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그 탓에 퀴즈쇼가 끝날 때쯤엔 격렬한 청문회장 가운데 앉은 다급한 속기사와 같은 마음만이 남았던 기억이다.


그래서인지 과잉기억 증후군이나 포토그래픽 메모리를 가진 이들에 관한 다큐나 글을 보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물론 수험생활을 겪어본 이라면 누구나 꿈꿔볼 만한 일이라만 내가 부러워한 이유는 수험 필승 전략과는 약간 달랐다. 그저 많은 게 궁금했고 알게 된 걸 잊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호기심과 산만함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이런 천성이 딱히 좋게 작용한 기억은 없다.


학부 시절 인턴을 하게 되어 내게도 사수가 생겼었다. 엄청나게 긴장하면서도 잘하고 싶단 의욕으로 가득 차 있던 시절. 그렇다 보니 이것저것 찾아보고 물어봤고 그런 내가 기특했던지 사수가 아닌 분들도 이런저런 조언을 주셨다. 그런데 어느 날 사수분이 부르시더니 ‘OO 씨, 궁금한 게 많은 게 나쁜 건 아닌데 옆길로 새지 말고 일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수로써 충분히 할 만한 말인데 얼굴이 화끈거리고 대나무처럼 위로 솟기만 하던 내 의지의 밑동이 잘려 넘어지는 느낌이었다. 아직도 그 일이 생생한 것을 보면 마음의 생채기 정도는 남아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제 회사선 그렇지 않지만 쉬는 날이면 영양가 없는 얘기들을 검색해보고 읽어보고 망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때가 허다하다. 그런 성격이면 아는 것도 많고 박학다식하겠네! 뭐야 결국 자랑이야?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현실은 반대에 가깝다. 관심사가 너무 자주 바뀌다 보니 그 깊이는 말도 못 하게 얕다. 온갖 얘기가 머릿속에 뒤섞여 잘못 기억하는 것들이 태반이고 잊어버리는 것이 또 태반이라 사실 제대로 아는 게 없고 오히려 머리가 텅 빈 느낌이다. 그렇다고 이 행위를 멈출 순 없다. 곧 잊을 거라 해도 뭔가 새로 ‘알게 되었다’ 또는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면 희한하게 과식을 한다. (머리) 속이 허하면 (위) 속을 채운다.


내 관심사는 허공에 뿌려진 미스트 입자처럼 자잘하고 넓게 퍼져있다. 처음엔 스프레이라고 표현하고 싶었지만, 스프레이 입자는 하나하나가 훨씬 크고 강렬한 느낌이다. 나의 그것은 얼굴을 향해서 뿌리지만 조금만 멀리서 뿌리면 공기 중으로 흡수되어 얼굴에 뿌린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안개 분자 미스트처럼 작고 미약하다. 누구한테 뽐낼 수 있을 만큼 지식에 대한 자신도 없고 안타깝게도 내 일과 관련도는 제로에 수렴하는지라 업무에 도움도 안 된다. 그래도 그달 그달 내가 제일 관심 있게 본 내용을 글로 쓸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면 이 공허함을 조금은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맘으로 그달의 관심사와 내 감정에 관한 글을 쓰려 한다. 물론 이런 주제로 글을 쓰겠다는 이 맘조차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하지만 일단 해보기로 한다.


나름의 포맷도 생각해놨다. 첫 줄은 주제의 정의로 시작하여 글을 쓸 것이며 정의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이건 온전히 내 아이디어는 아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찾는 게임을 시키셨다. 이 게임의 단 하나의 룰은 정의의 끝을 ‘것’으로 퉁치지 말 것. 사물이면 사물, 현상이면 현상 그 끝에 단어의 본질을 제대로 설명하는 정의를 만들라고 시키셨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의는 사전적 정의여서 결국 내가 가진 사전에 적힌 정의가 운 좋게 ‘것’으로 끝나지 않으면 그만이었지만 시작과 동시에 촤라락 넘어가는 종이 소리며 긴장감에 꽤나 즐겁게 게임에 임했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은 정의를 찾은 사람들은 발표하라 지시하셨고 우린 경쟁적으로 손을 들어, 내 사전의 정의가 최고다 뽐내고 싶어 했다. 그렇게 많은 종이사전이 모여 있었지만, 종종 모든 사전의 정의가 ‘것’으로 끝나는 때가 있었고 이럴 경우 의견을 모아 우리들만의 정의를 만들어 냈다. 내 사전이 꽤 그 놀이에 잘 맞아서 내 정의에 대해 선생님께 칭찬을 몇 번 들었고 친구들이 내 사전이 무엇이냐 물었다. 어쩌면 난 놀이 자체를 즐겼던 게 아니라 그 칭찬과 시선의 기억이 좋았는지 모른다. 역시 긍정의 피드백은 중요하다. 어쨌든 그 기억은 지금도 내가 무언가 설명할 때 먼저 생각하게 되는 그라운드 룰이 되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있으면 사람들(나도 포함)이 얼마나 말의 마무리를 ‘것’으로 끝내는지 놀라게 된다.


오늘은 앞으로의 글을 방향성을 풀어놓았다. 내 천성과 어린 시절까지 들먹이며 길게 말했지만 사실 그달 그달 내가 쓰고 싶은 주제로 쓰겠다는 것과 별반 다른 게 없다. 부디 이 방향성 정도는 유지할 일관성이 다음 달까지 남아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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