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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Mar 20. 2021

[Parapluie] 귀를 보며 쓴 어떤 이야기

너에게 안겨 시야가 좁아진다. 내 시야의 팔 할은 너의 머리와 어깨가 가득 채운 공간이고, 남은 이 할은 빛과 어둠이 경계 없이 섞인 공간이다. 뒤엉킨 빛과 어둠의 경계선을 명확히 하려고 눈을 찌푸려본다. 미간을 풀자 가까이 보이는 왼쪽 귀에 시선이 앉는다. 고수머리가 살짝 덮은 귀.


백열등이 너의 귀를 노른잣빛으로 투명하게 물들여 피부 아래 숨어있던 미세한 혈관 줄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바깥 귀의 곡선을 타고 흐르는 핏줄이 갈래갈래 흩어지는 모양새가 섬세해서 나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인다. 너의 심장 소리가 잠든 가슴에서 펄떡이다 목울대를 타고 올라가 귓바퀴에서 규칙적으로 울린다.


문득 부화하기를 기다리는 알 속의 노랗고 붉은 모습을 이미지가 귀의 모습을 대체한다. 까맣고 깊이를 모르는 귓구멍이 마치 새의 까만 눈 같다.


새는 껍데기를 부리로 찔러내어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외부의 공기에 날개를 건조해야 자유로울 수 있다지. 알을 깨고 나온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는데, 헤세가 아프락사스라고 명명한 존재는 결국 타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타인도 신도 알 속의 새에게는 미지와 경탄의 대상 아니겠는가.



대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목마른 자처럼 책장 사이를 헤매며 문장과 문단을 집어삼키던 때가 있었다. 문맥을 소화해냈는지와 상관없이 하나의 문장을 읽으면 그다음 문장을 읽어내려야 직성이 풀렸다. 하나의 책이 끝나면 다음 책을 바로 집어 들었다. 내가 무얼 하든 상관없이 한 방향으로만 지나가는 시간의 무심함이 두려워서였을까, 잠을 자야 하는 시간을 아까워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학교로 가는 지하철에서 읽을거리를 꺼내 들어야 했고, 눈꺼풀이 무거워져 끝내 감기기 전에 한 페이지라도 더 넘겨야 했던 무수한 밤이 있었다. 반은 기억하고 반은 잊어버릴 서적이 계절과 함께 내 손을 지나쳤다.


그러던 중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를 마주쳤다. 그 사람은 타자의 얼굴과 마주치는 경험은 다람쥐 쳇바퀴처럼 흘러가던 시간을 와해시키며 전혀 다른 성격의 시간을 열어낸다고 말했다. 이런 경험과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개별적인 존재가 유한성을 극복하고 인간성의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 그는 사회가 전체주의를 극복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기를 염원했다.


철학자의 이상과 상관없이 나는 타인의 얼굴을 직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외부의 경험은 나의 오감에 의한 1차 왜곡을 거쳐 경험과 지각에 의해 2차, 3차로 왜곡되기 마련이므로.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온전히 이해받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살아가기에.


타인과 내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듣고 받아들이는 순간은 영영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감각과 지각과 경험이라는 커튼을 걷어낼 수 있다고 가정해도 (그마저도 불가능에 가깝겠으나) 인간의 세포는 매 순간 생성하고 소멸하며 변하는데, 흐르는 강의 순간을 이해했다고 강을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사람은 평생 외로워하며 온기를 찾는 존재일 것이다.


각자가 갈구하는 이해는 전지전능한 신만이 하실 수 있는 행위이므로 종교에 이성과 논리를 초월하는 힘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 신성에 기대는 어린양 중 하나이지 않은가.



너와 내가 쌓아온 크고 작은 말의 탑에 돌아간다. 탑을 쌓는 도중 내가 알고 있다고 자신한 너의 얼굴이 흐려지고 낯선 얼굴이 나타나던 순간들을 들춰본다. 당혹스러워 어물쩡 넘겼던 순간과 설레어 귀를 붉혔던 순간이 순서를 앞다투어 나타나 지금 내 앞의 너를 다시 흐리게 한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귀를 가진 너는 누구일까.


나는 내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너를 만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낯선 너마저 알고 싶어서 너를 만나는 것일까. 그러다 네 모습이 아주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나에게 그 순간을 맞닥뜨릴 용기가 과연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까.


-까 로 종결하는 의문문도 평서문도 아닌 어중간한 문장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렇게 미지근한 문장은 꼬리가 달려서 다른 꼬리가 달린 문장을 불러내고, 이 문장은 또 제 모습과 유사한 문장을 불러내어 생각을 고리 모양으로 굴러가게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다루기 어려워지는 관계 앞에서는 유달리 확신에 찬 문장이 나타나지 않는다.


너에게도 동일한 이질감을 느끼던 순간이 있었겠지. 어떤 순간이었을까.


네 귀를 바라보며 너는 그런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혹은 외면했는지-입속으로 질문을 던진다. 너의 귀가 나를 어떻게 듣고 있는지 입속으로 물어본다.


신에 기댄다 해도 살의 온기를 손끝으로 만질 수 있는 존재에게 이해받고 싶은 욕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애석하게도 나는 인간에게 구원받고 싶은 욕심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가 더 쉽다는데, 알 껍데기 같은 귓바퀴에 딱 그만큼의 틈새라도 생기기를 기도한다.


빗방울이 토닥토닥 창틀에 듣는 소리가 요란해져 심장소리를 덮는다. 이 비가 지나가면 어린 신록은 짙은 녹색 빛깔로 어제보다 두툼해지고 울창해져 여름이 시작되겠지. 너와 함께 마주하는 또 다른 계절이 도래했다.


더운 계절이 지나가고 나면 나는 너를 이전보다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나를 기만하는 계절을 보냈다고 말할까. 나는 언제쯤 살랑거리는 문장의 꼬리를 잘라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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