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이 지났다. 새해 다짐도 없이 무언가를 쓰는 것보다 많이 듣고, 그보다 많이 보고 그게 아니면 별 의미도 없이 관성적으로 게임이나 하는 나날이었고, 한달글이 두달글이 되어버렸다. 이번 플레이리스트는 새해를 맞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그냥 내가 좋아하는, 요즘 많이 듣는, 여러분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들을 떠오르는 대로 모아보려 한다. 취미가 음악 듣기고 또 좋아하는 노래를 소개하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노래들이 생기는데, 이 글의 주요 독자층인 한달글 프로젝트 참가자들 중 몇몇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식상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평소에 추천하던 곡들과는 최대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사람의 취향이 그리 폭넓지 않아 결국 했던 말 또 하는 술주정처럼 될지도 모르겠다.
[취향의 근본에 자리 잡은 음악들]
사람의 음악적 취향은 10대 시절에 대부분 결정된다. 이 보편적 사실은 나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고, 30대가 된 아직까지도 10대 때 뿌리내린 취향에서 몇 발자국 가지 못했음을 시인한다. 한참 감수성이 길러질 10대에 내 덕질 레이더망에 있었던 뮤지션들은 몇 번이고 곱씹어 내 취향의 뼈대가 되었고,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이야기할 때 끊임없이 재현되거나 변주되며 나타날 것이기에 이 글의 머리 부분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서태지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들어본 적은 있지만 좀 낯선 이름일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동했던 시기는 나의 유년기 기억상실 시기였다. 즉, 현역 서태지와 아이들은 내 마지막 기억 저편에 있었고, 은퇴 후 솔로 복귀를 했을 때에는 방송활동은 일절 하지 않아 신비주의 프레임이 씌워질 정도였기 때문에 6집(솔로 2집) 활동 이후 울트라맨이야 공연 영상을 TV에서 우연히 보면서 동시대의 음악가로서 서태지를 처음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둔탁한 뉴메탈 사운드를 누군가의 도움 없이 소화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고, 2004년 발매된 7집으로 입문하게 되었다. 그래도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린킨파크 같은 얼터너티브 락, 뉴메탈 음악에도 익숙해졌고 7집 앨범 자체가 자칭 감성코어 사운드로 아무 백그라운드 없이 들어도 시원시원한 맛이 있어서 서점 음반코너에서 시청용 헤드폰으로 처음 들은 순간부터 빠져들게 되었다. 나는 그날 당장 집으로 달려가 서태지 전집을 다운받고는 디스코그래피를 역주행하기 시작했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널리 퍼트린 결과 한 명의 친구에게 전파시키는 데 성공했다. 중학생부터는 중간, 기말고사를 며칠씩 보면서 시험 끝나는 날이라는 게 생겨서 그 날이면 그 친구랑 노래방에 가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서태지 노래만 주구장창 불러댔고, 마침 동네에 생긴 오락실에는 코인 노래방이 있어서 하교길에 이따금씩 가서 부르곤 했었다.
서태지의 음악 소개라기보다는 처음 접했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길었는데, 처음으로 스스로 찾아들었던 음악이기도 하고 그렇다 보니 이후 쌓아온 음악 취향의 뿌리라서 더 각별한 것 같다. 모든 신화에서 창세기는 중요한 것처럼 개인이 가진 음악적 세계관의 창세기라고 생각해주길 바라며 양해를 구한다.
취향의 근본이라는 테마를 써놓고 나니 과연 이걸 넣는 게 좋을까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반에 하나쯤 있는 오덕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동방프로젝트는 일련의 미소녀 애니, 라이트노벨, 성우, 타입문 등등과 함께 오타쿠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카테고리이다. 되돌아보면 내가 앞 줄에 이야기한 모든 것에 발이라도 담그고 있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인데, 원래 중고등학생 때의 흥미란 그렇게 열정적인 건가보다.
중학교 시절을 시간상 절반으로 나누어 전반은 서태지, 후반은 동방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물론 감정적으로 큰 실망을 하지 않는 이상 탈덕이라는 건 쉽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분법적으로 단절된 것이 아니며, 취향의 캔버스에 수채물감으로 덧칠하듯 쌓아나갔다.
동방프로젝트는 중학교 2학년 때 아주 어려운 게임을 완벽하게 클리어하는 속칭 괴수들의 플레이 영상을 보다가 저건 무슨 게임인가 궁금해서 찾아보면서 알게 되었는데, 영상에서 보시다시피 보고 피하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 들 만큼 어지럽게 펼쳐지는 총알의 장막을 특징으로 하여 '탄막슈팅'이라는 장르에 속해있다. 기본적으로 기획, 프로그램, 그림, 음악 모두 혼자서 하는 1인 제작 게임이고 제작자인 ZUN이 2차 창작에 관대한 태도를 가지고 있어 관련 동인 문화가 다방면으로 발전하여 거대한 팬층을 이루고 있다. 나는 괴수 플레이는 고사하고 하드 난이도도 클리어할 수 없는 반사신경의 한계에 좌절하고 오히려 사운드트랙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한동안 원작 음악뿐만 아니라 2차 창작 동인들의 음악까지 찾아 모을 정도로 깊게 파고들었다. 아마도 각각의 악기 소리를 쪼개 듣는다거나 다른 버전의 편곡을 상상하는 습관은 이때 생긴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만 해도 유튜브가 존재하기 전이거나 그렇게 활성화되지 않는 시기였다. 그래도 동영상 플랫폼이라는 아이디어는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라 지금은 사라진 판도라TV나 엠앤캐스트 등에서 이전 PC통신 세대들보다 훨씬 나은 덕질이 가능했었다. 그때 동방 관련 매드무비(팬 비디오)를 찾다가 발견한 이 노래가 대략 중3 가을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나의 음악세계를 지배한 일생일대 덕질의 시발점이 되었다. 범프를 접하기 전에도 일본 애니 주제곡 등으로 일본 밴드의 음악을 접하기는 했지만 한 밴드에 빠져서 모든 곡을 다 섭렵하고 연관된 밴드들까지 점점 확장해가면서 듣게 된 것은 완전히 다른 형태의 경험이었다.
범프를 논할 때 가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범프 곡들은 감정이나 생각을 노래하는 보통 가요와는 달리 이야기가 있거나 상황 설정이 이미지로 와 닿는 특징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요와 비슷한 형식인 것 같은데 내용은 소년만화처럼 슬픈 이야기도 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도 있어서 사춘기 소년의 감성에 딱 맞추어져 있었다. 아마 고대 그리스의 음유시인이 이런 음악을 하지 않았을까? 덕분에 고등학교 시절 야자시간에 범프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 번역본을 보다가 선생님한테 걸려서 MP3를 뺏길 뻔한 적도 있었다.
서태지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사귄 친구들에게 범프를 영업하기 시작했고, 또 한 명 동지가 생겼다. 그렇게 둘이서 범프뿐만이 아니라 다른 밴드들도 파고 락페나 콘서트에 대한 꿈도 키워가던 중 범프 내한공연이 잡혔고, 기말고사고 뭐고 이거 놓치면 평생 후회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둘이서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첫 콘서트 경험이자 여태까지 범프의 마지막 내한공연이었다. 이후로도 그 친구와는 콘서트 친구이자 술친구이며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절친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범프의 전후로 X-Japan, Larc~en~Ciel, Asian Kung-Fu Generation, ELLEGARDEN, The Pillows, Radwimps, ONE OK ROCK 등등 일본 밴드 음악을 많이도 들었는데 하나하나 소개하기에는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 워낙 개인적인 경험의 축적이라서 그때를 같이한 그 한 명 빼고는 공감을 얻기에도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특히 범프 공연 영상을 찾아보면서 락페스티벌의 존재를 알게 되고 국내 락페 중계 등을 통해서 해외 뮤지션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트래비스, 뮤즈, 오아시스, 후바스탱크, 콜드플레이 등등 락페 라인업을 참고하여, 누군가의 추천으로, 아니면 그냥 우연히 웹진의 칼럼에서 얻어걸려 듣게 되는 해외 밴드가 많았는데 라디오헤드도 그중 하나였다. 아마 2008년에 라디오헤드의 베스트앨범이 나온다는 소식을 신문에선가 보고 대단한 밴드라고 이름은 몇 번 들어봤던 거 같은데 이 기회에 입문해보자 생각했었던 것 같다.
잠시 샛길로 빠져서 베스트앨범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나는 좋아하는 편이다. 새로운 음악을 많이 접하고 취향을 확립하는 중고등학생 시기에,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길고 커다란 발자취들을 남겨놓았을 것이고 동시대에 거장이 되어가는 아티스트와 발을 맞추어 가는 것도 개인의 음악 인생에서 큰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양쪽을 다 쫓아가는 것은 포기하기는 아쉽지만 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럴 때 베스트앨범이 진가를 발휘한다.베스트앨범은 주로 대중적으로 성공한 곡들을 수록하는데, 이런 방침이 이미 디스코그래피를 꿰고있고 자기만의 B Side 최애곡을 가진 매니아 계층에게는 불만스러울 수 있어도입문자가 소위 입덕하려면 대중적인 입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중적으로 성공한 곡들은 보통 정말 노래가 좋다. 라디오헤드의 베스트앨범은 아티스트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음반사에서 강제로 발매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나는 그 앨범으로 입문해서 누군가 나에게 누구 음악 좋아하세요 물으면 가장 먼저 라디오헤드가 떠오를 정도로 팬이 되었으니까 고마운 앨범일 수밖에 없다.
막상 라디오헤드로 화제가 돌아오니 별로 할 말은 없는 것 같다. 처음 들었을 때에는 Creep 말고는 너무 어려운데 하며 듣다가 Paranoid Android가 귀에 익을 때쯤 최애밴드가 되었다. 2집 The Bends, 3집 OK Computer, 7집 In Rainbows를 좋아했고, 이제 나온 지 5년이 되어가는 최근작 A Moon Shaped Pool은 아주 많이 들었다. 2012년 군대에 있을 때는 라디오헤드가 오는 지산락페를 가기 위해 일병휴가를 썼고, 미리 자리 잡는다고 들국화를 못 본 게 조금 후회되지만 살면서 보았던 최고의 공연 중 하나로 (범프 내한과 폴 맥카트니 내한과 함께) 일평생 기억할 것이다.
[요즘 들었던 노래들]
요즘은 유튜브에 웬만한 노래들이 다 올라오고, 편하게 감상할 수 있다 보니 새로운 음악을 접하는 건 유튜브 알고리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유튜브 알고리즘에 떠서 발견한 곡들을 소개해본다.
어느 장르를 파든지 덕후들에게는 'OO부심'이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애니, 게임 등 소위 오덕 취향은 애초에 순화시켜봐야 "서브컬쳐"정도라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어려우나 사회적으로 진지한 음악 감상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음악은 각자 자기 장르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크다. 클래식이건 재즈건 락이건 힙합이건 내가 듣는 장르의 음악이 최고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혹은 대놓고 내비치는 건 흔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디락, 언더힙합 장르는 '홍대병' 위험군이기도 하다. 나도 밖으로 펼쳐낸 적은 별로 없지만 나름 락덕후로서 두 가지 증상 모두 있었는데, 대학시절과 군대시절 락부심과 홍대병이 합쳐지며 '일단 들어보고 까자', '진정한 힙스터는 아이돌 음악도 듣지'라는 마인드로 발현이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 주로 듣는 장르가 kpop이 되어버렸고, 최근 새로 들은 노래들도 거의 kpop아이돌 그룹의 노래들이 많아졌다.
이 곡은 최근 유튜브의 추천으로 들었던 노래인데 인트로의 허스키한 보이스부터 취향저격이라 한동안 귀에 걸고 다니다시피 들었다. 멜로디나 편곡, 파트 분배와 목소리, 노랫말 등등 뭐라 똑부러지게 이야기는 못하지만 걸그룹에게 기대하는 미덕을 충실히 따르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주 장르가 kpop이라고는 하지만 보이그룹 노래들은 아무래도 손이 덜 가는 것 같다. 경험상 걸그룹의 음악이 다채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본진인 락음악에 이미 평생 들어도 못 들을 만큼 걸출한 남성 뮤지션들이 많기도 하다. 그리고 아저씨적 감성으로 10년도 더 어릴듯한 남자애들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잘생겼군 하고 감탄하고 있는 건 좀 꺼려지는 면이 있다. 그래도 걸그룹이 나왔으면 보이그룹도 하나 나오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어서 리스트에 넣어두었다. 물론 아무렇게나 넣은 건 아니고 나름 진지하게 kpop 장르의 팬으로서 최근 이목을 끄는 그룹이고, 앞서서와 같이 보이그룹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곡이라고 생각해서 추천하는 것이다. 글을 올리는 시점에 샤이니의 새 앨범이 나왔는데 나중에 다른 기회가 있다면 샤이니 이야기도 하고 싶다.
원어스는 작년에 tv로 음악방송을 보다가 TO BE OR NOT TO BE라는 활동곡 무대 퍼포먼스가 인상적이고 곡 자체도 구성이 재미있어서 찾아보게 되었다. 뮤직비디오는 마치 반지의 제왕이나 위쳐를 보는 듯하고 영상 퀄리티도 수준급이다. 보이그룹은 주 타겟층이 10대 여학생들일텐데 HOT나 동방신기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치명적 비극 왕자님 컨셉이 꾸준히 나오고 흥행하는 걸 보면 소녀감성이라는 말에 대응하는 키워드는 고전주의, 국경정벌, 쿠데타, 왕위찬탈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이외에도 '쉽게 쓰여진 노래' 같은 곡도 좋았는데 어디 소속사길래 이 정도 프로듀싱이 되는지 궁금해서 검색해봤더니 마마무가 소속되어있는 RBW라고 한다. 왠지 납득이 간다.
사족으로, 언젠가부터 지하철역에는 아이돌 멤버의 생일을 축하하는 광고판이 붙기 시작했는데 "내 자랑이 되어줘서 고마워"라든가 "태어나줘서 고마워"같은 멘트들이 적혀있다. 보통 사람들이 태어나줘서 고마울 정도로 느끼는 건 예수님이나 부처님 정도이기에 아이돌의 뜻이 우상이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난다.
이번엔 해외 곡이다. 버디는 2012년 2013년도쯤 처음 듣게 됐던 것 같은데, 당시 여성 싱어송라이터로는 아델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알게 된 Lana del Rey나 Lorde가 워낙에 개성이 강했기 때문에 버디는 장래가 기대되는 여성 싱어송라이터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새 앨범 발매와 함께 유튜브 알고리즘에 떠서 재발견하게 되었다. 멜로디가 민요풍이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지만 담백한 편곡과 목소리의 감정선이 마음에 들어 반복해서 듣게 된다. 앨범 전체로 들어도 꽤 좋고 이 참에 버디의 이전 곡들까지 몇 곡 찾아들었는데 노래를 참 잘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목소리와 감정에 맞는 노래도 정말 잘 쓰는 것 같다.
제목만 보고 드뷔시의 달빛을 최근에 알게 된 건가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곡 자체를 처음 접했다기보다는 연주하는 방법이 특별해서 최근 발견한 곡에 넣어두었다. 따라서 이 곡만큼은 위의 유튜브 영상을 통해 듣는 것이 필수적이다. 썸네일이나 연주 시작 부분부터 알 수 있듯이 흔히 볼 수 있는 악기의 모양은 아닌데, 모듈러 신디사이저라는 놈이다. 생김새와 동작하는 모습만 봐도 공대생을 설레게 하는 이 악기는 오실로스코프에서 나오는 전기적 파동 신호를 각종 변조모듈을 연결해 변조하고 다듬어서 여러 소리를 만들어낸다. 나는 라디오헤드의 조니 그린우드가 공연에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저게 대체 뭐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멋있게 생겼다 생각했었다. 한스 짐머 같은 영화음악가들이 모듈러 신스에 음 높이 정보를 입력할 수 있도록 키보드를 연결해서 많이 사용한다. 순수 전자음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악기의 물리적 특성에서 자유롭고, 이론적으로 어떤 소리든 낼 수 있다. 이 영상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듈러 신스의 매력은 대체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도 없는 노브들과 복잡하게 연결된 패치케이블로 포근하고 몽글몽글한 소리를 낸다는 점이다. 심장은 없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깡통로봇처럼.
[언젠가 한 번쯤 들려주고 싶던 곡들]
앞으로 소개할 곡들은 이 플레이리스트를 작성하면서 문득 떠오른 곡들 중에서 이때 아니면 잘 꺼내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든 노래들이다. 이렇게 취향을 마구잡이로 드러낼 자리나 시간은 매우 한정적이고, 문득문득 떠오르는 좋아하는 노래들은 많지만 앞선 두 파트와 조화를 맞추고 원래 취지인 앨범 한 장 정도 길이 안에 담기 위해 4곡만 꼽아 보았다. 엄선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결국 최종 선발 기준은 그냥이다.
R.E.M.이라는 밴드는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언제나 은근히 권하고 있지만 너무 은근한 나머지 아마 아무도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밴드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 컬리지 락이라는 장르로 불린다고 하고 너바나와 라디오헤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고 있다. 나는 군대가기 전 유럽여행 도중 숙소에서 MTV를 보다가 Losing My Religion의 뮤직비디오가 나와서 REM을 처음 접했는데, 뮤직비디오가 강렬하게 뇌리에 남은 데다 밴드 이름도 기억하기 쉬워서 이후로도 종종 찾아들었다. 그리고 군대에 있을 때 휴가 복귀 열차 기다리며 서점에 들렀는데 R.E.M 베스트 앨범이 있길래 사서 듣고 몇 곡 더 알게 된 정도지만 그 몇 곡 만으로도 아주 좋아하는 밴드이다.
이 곡은 노래 자체로도 잔잔하고 좋지만 뮤직비디오도 독특하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는 걷는다는 행위의 종교적인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 정도인데 '누구나 상처 받기 마련이지'라는 주제와 어우러져서 그냥 뭔가 지칠 때 가끔 꺼내 듣기에 좋다. 추가로, 이 곡에 이어서 Foo Fighters - Walk의 뮤직비디오를 본다면 묘하게 연결되며 두배는 더 기운차게 만들어줄 것이다.
세상에는 특정 시간에 대해 노래하는 곡들이 아주 많다. 2002처럼 특정 연도를 지칭하거나 September처럼 어떤 달에 관해서 노래하기도 하고 아니면 요일을 소재로 삼기도 하는데 특히 요일에 관한 곡들이 많이 떠오른다. Sting의 Seven Days나 김종찬의 토요일은 밤이 좋아, 혹은 2010년대 버전인 로맨틱펀치의 토요일 밤이 좋아, 재미있는 쪽으로는 제국의 아이들 마젤토브, 스펀지밥이 부르는 월요일 좋아까지다양해서 이 주제로 하나의 플레이리스트를 계획한 적이 있을 정도인데 그중에서도 이 곡은 아이유의 금요일에 만나요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요일송이다.
아마 큐어는 몰라도 이 곡은 영화 어바웃타임에서 사용된 걸 들어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목부터 금요일의 설렘을 표현한 곡으로 아이유의 금요일에 만나요와 곡의 내용도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먼 선배 격 되는 곡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교롭게도 위의 Everybody Hurts와 같은 1992년도 곡인데 나이로 따지고 보면 노래는 물론이고 아이유 본인보다 먼저 태어난 곡이다. 개인적으로는 금요일 퇴근길에 귀가송으로 가끔듣는데 홀가분하면서도 설레는 기분을 극대화시켜준다. 이 글을 목요일이나 금요일 오전에 올릴 수 있다면 여러분들이 이 곡을 듣기가 더 좋았을 텐데 내 게으름으로 인해 일요일이나 어쩌면 3월이 되어야 올라갈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조용필은 가왕이라고 불리는 명성에 비해 찾아서 듣게 된 지는 얼마 안 됐고 아직 아는 노래도 많지는 않다. 그래도 소개할만한 좋은 노래가 뭐 있지 하면 조용필 음악이 항상 떠오르는 건 곡 자체가 좋을뿐더러 실연에 있어서도 언제나 최고의 퀄리티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곡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사실 나는 이 곡을 조용필의 노래가 아니라 어린 시절 스티브 유의 리메이크 곡으로 처음 들었다. 그때 당시에도 노래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85년도 곡이니 훨씬 오래전 곡이었고, 2021년에 들어도 여전히 좋다. 가사는 요즘 감성은 아니지만 나는 이렇게 사색하는 가사도 좋아한다. 이런 가사를 좋아한다면 무한궤도의 우리앞의 생이 끝나갈 때도 추천한다.
앞에서 실연이라고 말한 것은 가수의 노래와 연주자의 악기 연주를 의미하는데, 노래야 매번 들을 때마다 가왕이라는 말이 사람들이 그냥 붙인 별명이 아니구나라는걸 느낄 수 있고 연주도 전문적으로는 모르지만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라는 밴드 이름에 걸맞은 실력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퀄리티라는게 라이브와 레코드를 막론하고 내가 들었던 모든 조용필 노래가 다 좋아서 추천하는데 부담이 없다.
이 노래는 앞 곡 큐어의 노래와는 반대로 끝나가는 주말에 들으면 마음이 심란해질 우려가 있으니 듣는 시간에 주의를 요한다.
이전 플레이리스트를 본 사람들은 알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산울림을 좋아한다. 한국 음악을 이야기할 때 나는 취향에 근거하여 한국 락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결국 아무리 경계해도 또중현, 또울림, 또국화 타령을 늘어놓고 있다. 산울림은 비틀즈처럼 잘 알려진 좋은 곡도 많지만 앨범을 쭉 듣다 보면 잘 몰랐던 좋은 곡들이 불쑥 튀어나온다. 풋내기들의 합창도 앨범을 정주행하다가 알게 된 곡인데 우선 풋내기라는 단어 자체가 그 시대에서는 흔했을지 몰라도 지금 듣기에 매우 신선하게 들린다. 거기에 가사 내용도 듣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앞의 조용필라이브를 듣고 이 곡을 들으면 헛웃음이 나오겠지만, 시대가 앞서기도 하고 어리숙할지언정 약지 않은 청춘에 대한 찬가로서는 오히려 이런 연주가 어울리지 않을까싶다.
취향에 대한 이야기만큼 할 말이 많고 또 조심스러운 게 없을 것 같다. 시작은 가벼운 마음이었으나 어떻게 하면 마음에 들어있는 것들을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모자라지 않게, 그리고 쉽게 읽히도록 표현할까 고민하다 보니 한 곡을 소개하는데 2~3일씩이나 걸리기도 하고 결국엔 이렇게나 늦어버렸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해받고 존중받고 싶은 욕망이 정말 크다는 것을 느꼈다. 역으로 이 글을 읽은 여러분들의 취향도 서로 공유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