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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Jan 18. 2021

[장문장]내가 투표를 하지 않은 이유

0.

2020년 4월 15일 21대 국회의원 선거. 나는 투표를 하지 않았다. 제도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흐름에서 한 발 비켜났다. 다만 이 글을 쓰기 위한 불참이었다. 투표는 결론을 내는 행위다. 행사한 투표는 금방 잊혀지지만, 하지 않은 투표는 오래도록 숙제로 남는다. 투표를 해야한다는 현대의 정언명령 앞에서 두 달간의 내적 꾸중을 들었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왜 투표를 하지 않았는지 전전긍긍하며 이야기했다. 그런 각고의 세월을 거쳐서, 이제 글로 내보낼만큼 생각이 갈무리가 되었다.


1.

나는 원래 이 제도에 의문이 있었다. 의문을 갖는 계기가 된 두 사건은 개인적 규모에서, 또 국가적 규모에서 일어났다.


개인적 규모의 사건은 대학 4학년 때였다. 동아리 부회장을 마치고 다음 회장/부회장을 뽑는 시기였다. 구성원 대부분이 취직이 급한 고학번이어서 회장 후보는 애초에 모수가 적었다. 적기는 뭐야, 사실 2명 밖에 없었다. 그 두 명이 회장-부회장으로 나가지 않으면 남은 후보는 1학년이나 4학년이었다. 나는 둘이 해주길 간절히 빌었고, 다행히 두 사람이 회장-부회장 쌍으로 단독출마를 해주었다.


그런데 회장으로 출마하는 사람은 다소 인망이 얕았고, 오히려 부회장 쪽이 인망이 좋은 편이었다. 물론 역할은 합의하에 정한 것이고, 타이틀보다는 이들이 정한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중요한 일이 아니었는데, 투표 당일 반대 과반으로 단독후보가 낙선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다.


전조는 있었다. 사실 전날 나에게 전화가 한 통 왔었다. 현재 회장-부회장 후보에 반대하고, 반대표를 던지자는 한 구성원의 연락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고는, 그럼 니가 나갈거야? 라고 일축했다. 대안이 없는 비판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그러자 지금 1학년인 친구를 회장으로 세우겠다고 이야기했다. 걔가 한대?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현실성은 없었다.


그리고 개표 당일 처참하게도 반대표가 아슬아슬하게 더 나와버리고, 나는 정자에 획을 하나하나 그으면서 손이 떨려왔다. 마이크를 잡고는 30분 정회하오니 대안을 찾아서 입후보하라고 했다.


물론 누구도 입후보하지 않았다. 반대표를 던진 사람들은 뭘 기대한걸까? 결국 회장과 부회장이 서로 직함을 바꾸어 재출마했다. 반대로 인해 낙선한 후보는 같은 직함으로 재출마할 수 없다는 쓸 데 없이 깐깐한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전화를 했던 그 친구가 공들여 만든 회칙이었다. 그래서 당선이 되었을까? 됐다. 혹여나 안 되었다면 내 마지막 직귄으로 중앙동아리 해체신청서를 넣고 잠적했을 것이다. 반대표를 던진 사람들이 원한 게 이것이었을까?


나는 이 모든 과정의 사회자로서, 모두의 표정을 보았다. 만인이 평등하게 같은 무게의 권리를 행사하는 이 제도가 우습다는, 민주주의의 해악이 될 생각을 했다. 누군가는 ‘마음이 아프지만 이건 누군가 일찍이 내렸어야할 심판이야’ 라는 표정이었고,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도 있었으며, 대부분은 그냥 이 자리를 빨리 피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한 명은 “반대표로 경각심을 주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책임지지 못할 반대표를 던졌다. 투표와 책임이란 어색한 단어의 조합이다. 우리는 평소에 투표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대개는 믿는 것에 기반하여 표를 던지고, 대세와 무관하게 자기표현에 만족한다. 국가적 규모에서 훈련된 편리한 마음가짐으로 동아리 같은 작은 단위의 민주주의에 참여하면 이런 사단이 난다.


어쨌든 두 명의 리더가 당선되었고, 어쨌든 고기집에서 뒤풀이를 했고, 나는 다시는 동아리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아리가 어떻게 됐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공정하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도 희생할 생각이 없으면서 타인의 희생을 이리저리 재보며 심판하고자 하는 자세는, 이 제도가 우리에게 너무나 쉽고 가볍게 권리를 주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국가적 규모에서 발생한 사건은 물론 2012년에 있었던 박근혜의 당선이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가장 마초적인 그 아비의 망령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다.


사실 내가 투표를 하는 레퍼토리는 정해져있다. 대충 매번 이름이 바뀌는 한나라당의 매번 이름이 바뀌는 대적자를 찍는데, 대적자에게 여유가 있는 경우에는 녹색당이나 정의당을 찍는다. 이런 엉성한 로직으로 투표를 해도 되는가? 모든 사람이 투표를 해야한다는 명제에는 중요한 조건이 빠져있다. 각자 권리행사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우리는 투표 결과에 의해서 고통을 받더라도, 처벌받지는 않는다. 투표의 책임은 결과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투표권에 대응하는 책임은 권리를 성실하게 행사하는 것이다. 성실이란 주어진 범위의 공동체의 구성자임을 인지한 상태에서 주어진 선택지에 대해 공동체의 최선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최선인가?


2. 

팩트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어느 진영이든 팩트 하나 쯤 들고있는 세상이 되었다. 팩트는 ‘진실’보다는 공격적인 늬앙스를 품고 폭격/폭력 같은 단어와 연결된다. 나는 정의, 상식, 그리고 팩트를 말하는 모든 이들을 불신하며, 동시에 스스로 진실을 탐구할 의사는 없는 불가지론자다. 내가 이런 인간 군상이 되는 데는 또 다시 두 사건이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는 송악산 5.4 전투다. 6.25 한 달 전에 일어난 이 전투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6.25 전쟁에서 왜 그토록 빠르게 서울을 내주었던가? 당시 북한은 평화무드를 조성했고, 한국군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많은 병사들이 휴가를 나간 상황이었으며, 갑작스러운 기습에 순식간에 서울을 잃었다. 북한은 참으로 신의가 없는 족속들이다. 초등학생 장문장은 그렇게 배웠다.


작년 초 이희재 교수의 <번역전쟁>에서 송악산 5.4 전투에 대해 읽었다. 개성 근처 송악산 고지를 국군이 점령하고자 진격했고, 100명의 국군과 137명의 조선인민군이 사망했으며, 국군은 끝내 고지 점렴에 실패했다. 사실 6.25 직전 삼팔선에서는 많은 전투가 있었다. 만약 송악산 5.4 전투가 확장되었다면 한국전쟁은 북침으로 기록됐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평화무드가 조성될 분위기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제서야 생각해보니 기습을 당하고서 도덕을 논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왜 이제서야 이걸 깨달았을까? 우유가 건강에 안 좋다는 말을 들었을때만큼 충격적이었다. 세상이 내게 떠먹여주는 팩트라는 것들은 이익을 잣대로 편집된 정보들이다. 다행히 우리의 의식에는 거름망이 있어서, 거름망에 걸리는 정보들을 의심해볼 수 있다. 거름망이 촘촘할수록 쉽게 속지 않고, 믿음에 많은 비용이 든다. 내 의식의 거름만은 이제 한없이 촘촘해져서, 무엇도 믿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다만 어릴 적 내 허술한 의식의 거름망을 뚫고 들어온 정보들은 어른이 된 내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제는 한없이 촘촘해진 의식의 거름망 밑에서.


두 번째 사건은 한국군 해병대의 베트남 양민 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어느 일본인이 쓴 논설 때문이었다. 한국은 일본의 과오에 집착하지만 정작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는 전혀 사과하지 않고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을 보라! 나는 이 주장에 반감과 예비된 수치심을 느꼈고, 진실을 찾아보기로 했다. 해병대의 양민학살은 진실이었고 한국이 베트남에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지 못한 데는 사연이 있다. 베트남 정부가 사과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일까?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이에 대해 ‘유감표명’을 한 적이 있다.


“문 대통령은 애초 이번 베트남 방문에서 민간인 학살에 대해 공개적이고 명확한 사과에 나설 뜻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베트남 정부가 동족상잔 등의 내부 문제가 부각되는 것을 우려하며 난색을 표해 사과 수위가 크게 낮아진 것으로 전해졌다.”(한겨레)


그 전에도 2001년 김대중,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한 바가 있다. 진보는 피해에 대한 증언과 기록을 바탕으로 줄기차게 사과를 주장하고 있고, 보수는 피해사실을 전쟁에서 흔한 실수라던가, 양민 사이에 숨어드는 전략을 취한 베트콩이 원인이라던가, 혹은 기록이 조작되었다는 말을 한다. 여튼 일본인 논설가의 주장은 타당한 면이 있다. 우리는 일본군의 잔학함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지만 국군이 다른 나라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잘 듣지 못했다. 역사에 대한 선택적 인식이다. 이에 대해 정규교육과정이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것은, 이왕이면 사과를 마무리하고 교과서에 싣고 싶은 진보 진영과 아예 없는 일로 하고 싶은 보수 진영의 드문 합작이지 싶다.


당시 이 모든 주장을 찾아보는데 한참이 걸렸다. 도대체 진실이란 어디에 있는지! 하나의 정치적 사건에 대해 선악과 이해와 정의를 가리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많은 공이 든다. 특히 논쟁이 진행중이라면 사건을 이해하기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각 진영의 주장은 이러하다’ 정도가 개인이 공을 들여 낼 수 있는 결론이다. 공동체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우리는 이제 우리와 사실관계, 이익관계가 없는 사건들을 통해서 정당, 정책, 후보자를 판단해야하는 경우가 생긴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가깝지 않은 사건을 다룰 힘이 없다. 어떤 인간도 믿지 못하는 것이 정치적 염증이라면, 어떤 정보도 믿지 못하는 것을 정치적 어지럼증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정치적 무기력은 두 병증의 합병증이자, 정치와 우리 삶의 거리에 따른 결과물이다. 문제는 이 어지럼증을 극복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시대에 어지럽지 않은 이는 오직 하나의 정보제공처만을 신봉하고 그 외의 정보를 부정하는 길을 택한 사람들 뿐이다.


3. 

빗방울 하나가 강을 범람시키는 것은 아니고, 내 한 표가 영향력이 있어 투표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투표를 하는 이유는 투표라는 행위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근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20대 투표율을 위해서, 또는 소수 의견의 존재감을 위해서다. 나는 첫 장에서 투표의 책임을, 그리고 두 번째 장에서 그 판단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의 민주주의에 의문이 든다. 책임 있는 투표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해보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어지럽히는 가십이 쏟아지고, 진실을 파악는 비용은 너무나 크다. 그 와중에 공들여 결론낸 한 표는 민망할 정도로 미약하다. 적극적인 정치적 행동을 취하기에는 삶이 벅차다. 이것은 개인의 노력이나 태도,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개인이 책임 있는 투표를 하기 위해 치러야하는 비용이 너무 큰 것이다. 정치는 이제 개인이 접근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니 신경 끄시고 자기개발이나 열심히 합시다! 그것 또한 좋다. 이 역시 일종의 정치적 의사표현이다. 뽑을 정당이 없어 무효표를 던지듯, 제도에 대한 무효표를 던지는 것이다. 개인에게 체제의 문제에 투신해야할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와 가깝지 않은 것들을 그대로 멀리 두고 개인적인 삶에 집중해도 좋다. 그러니까, 어려운 말이지만, 투표를 꼭 해야하는 건 아니다.


사실 우리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나와 무관해보이는 것들을 억지로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백선엽이 친일파든 전쟁영웅이든 어디 묻히든 나랑 무슨 상관인가? 큰 정치와 작은 정치가 있다. 나와 무관해보이는, 티비에 나오는 것들이 큰 정치라면, 야채가게 가판대가 출근길을 좁힌다던가 집 주변 공사소음이 심한 것은 작은 정치다. 최근 회사 게시판에는 “청소 여사님들이 걸레 빠는 곳에서 양치를 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임직원 화장실을 함께 쓸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라는 의견이 올라왔다. 좋은 의견인지는 여사님들의 말을 들어봐야 알겠지만, 여튼간에 이런 의견이 올라오고, 또 논의되는 것이 작은 정치의 현장이다. 우리는 국가, 혹은 지구에 속하지만, 개인이 인지할 수 있는 공동체는 고작해야 학교, 회사, 동네 수준이다. 바꿔서 말하면 고작 그 정도에서 나와 사실관계, 이해관계가 있는 사안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정치적이다. 투표는 결론을 내는 행위다.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투표를 할 수 없다. 작은 정치와 큰 정치가 이어지는 점을 찾으면 내 삶에서 비롯된 정치적 시점을 정할 수 있다. 투표는 그 때 해도 충분하다. 아니, 그 전에 하는 투표가 얼마나 의미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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